노동자 자살로 내몬 일본 재량노동제 파문…왜?

재량노동제 적용 부동산 업체 직원 자살
잔업해도 미리 합의한 시간 외 수당 없어
아베 정부 일하는 방식 개혁에도 타격
일하는 방식 다양화를 명분 삼지만
노동자에 대가 없는 잔업 강요 비판

아베 신조 총리. AP 연합뉴스

2016년 9월 일본 대형 부동산 업체 노무라부동산에서 일하던 50대 남성 사원이 과로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남성의 비극은 아베 신조 정권의 노동 개혁 방식에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를 죽음으로 몰고간 배경에는 정부가 추진한 ‘재량노동제’가 있기 때문이다.

재량노동제는 노사가 미리 총 노동시간을 합의해, 그 시간 안에서 출퇴근 시간을 탄력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제도다. 임금은 합의한 노동시간만큼만 지급되고, 초과 근무를 해도 잔업수당을 받지 못한다.

4일 <아사히신문>을 보면, 자살한 남성은 아파트 입주자를 모집하고 집주인과 세입자 사이의 계약과 계약 해지 등을 중개하는 일을 해왔다. 일본에서는 부동산 관리회사를 통해 주택 임대차를 하는 경우가 많다. 노무라부동산은 원래는 기획 업무를 하는 사람에게만 적용해야 하는 ‘기획업무형 재량노동제’를 도입했으나, 규정을 위반해 영업직까지 포함시키면서 사원 1900명 중 600명에게 재량노동제를 적용했다. 목숨을 끊은 직원은 집주인과 세입자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면 휴일에도 일하곤 했다. 잔업 시간이 월 180시간 이상인 때도 있었다. 건강이 악화돼 2016년 봄에 휴직했지만 이후 복직했다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 후생노동성은 지난해 말 노무라부동산에 대해 이례적으로 특별지도에 나섰지만, 이 사건이 계기였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밝히지 않았다.

아베 총리는 기존에 기자나 연구직, 기획 업무 담당자 등에게만 적용할 수 있었던 재량노동제를 일정 범위의 영업직과 관리직에도 확대 적용할 수 있게 하는 법안을 ‘일하는 방식 개혁안’의 하나로 올해 정기국회에서 통과시키려 했다. 하지만 후생노동성이 작성한 재량노동제 관련 자료가 엉터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궁지에 몰렸다. 후생노동성이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만든 자료에는 재량노동제 적용 노동자가 일반 노동자보다 근무 시간이 짧다고 돼 있으나, 양쪽에 던진 질문 자체가 다른 것으로 드러났다. 또 재량노동제 확대에 유리하도록 잘못 기재된 데이터가 400건 이상 발견됐다. 아베 총리는 엉터리 자료에 근거한 국회 답변에 대해 사과했다. 확대 법안 제출도 미루기로 했다.

야당은 아베 총리가 도입을 추진하는 또다른 제도인 ‘고도 프로페셔널제도’의 철회도 요구하고 있다. 이 제도는 연 수입 1075만엔(1억1044만원) 이상인 전문직 노동자는 연 104일의 휴가를 보장하는 대신 잔업수당을 지급하지 않는 것이 뼈대다.

아베 정부의 ‘일하는 방식 개혁안’은 인구 감소에 따른 노동력 부족과 장시간 노동을 해결하는 게 목표다. 고도 성장 시기처럼 일률적으로 회사에 모여서 장시간 노동을 하지 말라는 취지로, 잔업 시간은 원칙적으로 연 360시간 이하로 정하고 어길 경우 처벌할 수 있는 법안도 추진한다. 하지만 동시에 노동 규제 완화도 추진하고 있다. 명분은 일하는 방식 다양화이지만 현장에서는 약자인 노동자에게 대가 없는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는 꼴이 되고 있다.

도쿄/조기원 특파원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