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무역장벽’ 미국 빼고 세계 각국과 FTA

EU와 경제동반자협정 서명
내년 3월 시행 땐 94% 무관세
환태 11개국 CPTTP 내년 발효
아세안 RCEP 체결도 추진중

아베 신조(가운데) 일본 총리와 장 클로드 융커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도날트 투스크 유럽연합 정상회의 상임의장이 17일 일본 도쿄에서 일본-유럽연합 경제동반자협정(EPA) 서명 관련 기자회견을 한 뒤 웃고 있다. 도쿄/AP 연합뉴스

“보호주의 움직임이 확대되는 가운데 일본과 유럽연합(EU)이 자유무역 기수로서 세계를 주도해가고 싶다.”(아베 신조 일본 총리)

“관세전쟁, 거친 말, 무책임이 진정한 위험이다”(도날트 투스크 유럽연합 정상회의 상임의장)

17일 도쿄에서 열린 유럽연합과 일본의 자유무역협정(FTA)인 경제동반자협정(EPA) 서명식에서 두 정상은 보호무역주의를 배격한다는 말을 주고받았다. ‘미국 제일주의’를 내세우며 무역전쟁을 주도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직접 거론하진 않았지만, 결국 그가 추진하는 보호주의 흐름을 견제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유럽과 일본은 미국의 보호무역주의에 맞서 전 세계 총생산의 30%를 차지하는 거대 자유무역지대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일본과 유럽연합은 서둘러 의회 비준 절차를 마치고 2019년 3월 협정을 발효시킬 계획이다.

이 협정이 시행되면 일본은 전체 상품의 94%, 유럽연합은 99%의 관세를 철폐하게 된다. 이 협정 이후 치즈, 포도주, 돼지고기 등 높은 경쟁력을 자랑하는 유럽연합의 농축산물이 싼 가격으로 일본에 들어오게 된다. 이 경우 미국산 농산물이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반대로 유럽에선 일본의 자동차와 전자제품 등을 싸게 구입할 수 있다. 일본 외무성은 이 협정으로 일본의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약 5조엔(약 50조원) 늘어나고, 29만개의 일자리가 새로 생길 것이라 예측했다.

일본 경제산업성 관계자는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정부가) 상당히 무리를 해 합의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아직 세부적으로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쟁점이 남아 있지만, 무리해 이날 서명식을 진행했다는 뜻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해 1월 출범 직후 전임 버락 오바마 행정부와 일본이 주도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티피피)에서 일방적으로 이탈하자, 일본 정부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이후 일본은 트럼프 발 보호무역 흐름에 맞서기 위해 다방면으로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했다. 미국의 이탈로 위기에 빠진 티피피는 미국을 빼고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등 11개국과 함께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으로 이름을 바꿔 서명이 이뤄졌고, 내년 초 발효가 목표다.

일본은 또 한국,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연합(ASEAN) 등이 참여하는 자유무역 협정인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체결도 추진 중이다. 이를 위해 17일 타이 방콕에서 회의가 열렸다. 일본은 이달 말부터는 미국과 각료급 무역협의인 에프에프아르(FFR)를 시작한다.

유럽연합도 일본과 체결한 자유무역협정에 큰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다. 유럽은 미국과 범대서양무역투자동반자협정(TTIP)을 추진해 왔으나, “무역 면에서 보면 유럽은 미국의 적”이라는 인식을 가진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 이후 체결 가망성이 사라진 상태다. 유럽연합 관계자는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존재감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도쿄/조기원 특파원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