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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일본

“길게 살아 전쟁 책임 말 들어” 일왕 히로히토, 반성을 몰랐다

등록 2018-08-24 14:56수정 2018-08-24 22:17

1989년 사망한 히로히토 전 일왕
죽기 전 “길게 살았더니 전쟁 책임 말 듣고”
아시아태평양전쟁 전범 불구
‘도쿄재판’서 완벽한 면죄부 얻어
‘평화주의자’ 이미지 얻고 천수 누려
히로히토 전 일왕(1901~1989, 재위 1926~1989)의 죽기 2년 전 발언이 최근 공개돼 논란입니다. 교도통신은 23일 히로히토의 시종이었던 고바야시 시노부의 일기를 유족으로부터 입수해 보도했는데요. 보도를 보면, 히로히토는 1987년 4월 “가늘게 길게 살아도 어쩔 수 없다. 괴로운 일을 보거나 듣거나 하는 일이 많아지게 될 뿐”이라며 “형제 등이 상을 당하거나 전쟁 책임이라는 말을 듣는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놀랍지 않습니다. ‘전범’에서 ‘평화주의자’로 얼굴을 바꾼 채 천수를 누렸던 히로히토는 끝까지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책임을 도조 히데키 등 극소수 군부 인사들에게 돌렸습니다. 자신은 군부의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오히려 전쟁을 끝낸 ‘공’이 있다는 겁니다. 반성을 모르는 그의 진짜 얼굴을 널리 알려진 역사적 사실을 통해 돌아봤습니다.

히로히토 전 일왕.  자료사진
히로히토 전 일왕. 자료사진
■ ‘만세일계의 천황’은 군 통수권자였다

히로히토가 침략전쟁 당시 군부의 ‘허수아비’가 아니라, 군 통수권자로서 주도적으로 의사 결정을 이끌었다는 점은 당시 시종의 일기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이번에 공개된 고바야시 시노부의 일기 말고 2007년 공개된 히로히토의 또 다른 시종 오구라 구라지 전 도쿄도립대 법경학부장의 일기는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9년 5월부터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한 1945년 8월까지 쓰인 것으로 히로히토의 정치적·군사적 역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료입니다.

이 일기를 보면, 1940년 5월 히로히토는중국이 의외로 강하다. 전쟁의 진상을 모두가 잘못 보고 있다. 특히, 전문인 육군조차 관측을 잘못하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듬해 1월에는 “중국을 얕봤다”며 되도록 빨리 전쟁을 끝내 국력을 더 비축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이보다 앞선 1939년 7월에는 육군대신을 앞에 두고 ‘결말을 어떻게 내려고 하느냐’며 큰소리로 혼잣말을 했다고 일기는 기록했습니다. 전쟁을 부담스러워 하면서도 전쟁에 대해 면밀히 준비하고 냉철히 임해야 한다는 생각이 담겨 있는 대목도 있습니다. 1941년 12월 미국 진주만 공습 뒤에는 “평화를 되찾으면 남양을 보고 싶다. 일본의 영토가 된다면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라며 정복욕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관련기사: 히로히토 “중일전쟁 시작하기 싫었다”)

이는 당시 ‘메이지 헌법’이 히로히토를 ‘최고 권위’로 삼아 절대적인 권력을 부여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주요 조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1조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한다’

제3조 ‘천황은 신성하여 침범해서는 안 된다’

제4조 ‘천황은 국가의 원수로서 통치권을 총람하고 이 헌법의 조규에 의해 이를 행한다’

모두 17개로 이뤄진 천황 관련 조항은 이외에도 행정·입법부에 대한 통제나 육해군의 통제권이 천황에 귀속됨을 명확히 하고 있었습니다.

미국, 일본에서 수십 년 동안 일본사를 가르쳐온 역사학자 허버트 빅스는 책 <히로히토 평전-근대 일본의 형성>에서 히로히토의 활약을 정리하며 그를 “기동성 있는” 군주라고 썼습니다. 책을 보면, 말수가 적었던 히로히토는 침략 행위와 정책에 대한 재가와 인정, 용인 등을 통해 자신의 의중을 구현했습니다. 내각 각료와 군부의 이견이 발생하면 그는 늘 강경파 군부의 손을 들어줬으며 1931년 일본 육군(관동군)이 상부 명령을 무시하고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때도 처벌론을 외면하고 육군의 강경 도발을 용인했습니다.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에서는 대본영에서 직접 전쟁을 지휘했었는데요. 패색이 짙어지던 1942년께부터 도고 시게노리 당시 외무대신이 건의한 항복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관련기사: “히로히토는 신권군주이자 전쟁 지도자”)

1938년 1월 일본 육군의 열병을 하고 있는 군복 차림의 히로히토. 일본 위키피디아
1938년 1월 일본 육군의 열병을 하고 있는 군복 차림의 히로히토. 일본 위키피디아
태평양전쟁 당시 총리이자 A급 전범인 도조 히데키(1884~1948)는 1946년 5월부터 31개월에 걸쳐 진행된 ‘도쿄 전범재판’에서 “우리 일본인들 중 감히 어느 누구도 천황의 뜻에 반하여 행동할 수가 없다”고 증언한 바 있습니다.

■ 완벽한 면죄부 안겨준 ‘도쿄 전범재판’

히로히토에게 완벽한 면죄부를 안겨준 당사자는 당시 연합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였습니다. 맥아더는 “만약 천황을 구속한다면 우리의 점령 계획에 큰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는 내용의 편지를 합동참모본부에 보내는 등 히로히토의 기소 움직임을 저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결국 도쿄 전범재판에 서지 않은 히로히토는 맥아더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기도 했는데요.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교수는 2007년 <한겨레> 칼럼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썼습니다.

1945년 9월27일 패전국 일본의 히로히토 일왕(천황)과 점령군 미군의 더글라스 맥아더 사령관이 첫 공식회견에서 찍은 사진. 일본 제국주의 헌법에서 신적인 존재였던 일왕의 초라한 모습이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아사카기지/ 미국 국회도서관 제공
1945년 9월27일 패전국 일본의 히로히토 일왕(천황)과 점령군 미군의 더글라스 맥아더 사령관이 첫 공식회견에서 찍은 사진. 일본 제국주의 헌법에서 신적인 존재였던 일왕의 초라한 모습이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아사카기지/ 미국 국회도서관 제공

1951년 4월15일 점령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와 히로히토 천황의 마지막 회담(11번째)이 열렸을 때, 천황은 맥아더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쟁재판에 대해 귀 사령관이 취하신 태도에 대해 이 기회에 사의를 표하고 싶다.” 맥아더의 답은 이렇다. “워싱턴에서 천황 재판에 대해 의견을 물어왔지만 물론 반대했다.” 이런 대화 내용은 회담에서 히로히토 천황의 통역을 지낸 외교관 마쓰이 아키라의 수기에서 밝혀진 것이다. (<아사히신문> 2002년 8월5일치 보도)

이어서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는 “도쿄재판에서 천황 불기소를 결정한 것은 점령통치와 친미 정권 확립을 위해 천황을 이용하려고 했던 미국 정부였다. 도쿄재판은 이런 의미에서 A급 전범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천황에게 면죄부를 준 재판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며 비판했습니다. (▶관련기사: 히로히토가 도쿄재판을 반긴 까닭은)

당시 일본 사회 역시 도쿄 전범재판의 결과를 비판 없이 받아들이며 히로히토에게 면죄부를 주기 바빴습니다. 1948년 도조 히데키 등 전범 7명이 처형되자 일본 언론들은 그들의 죽음으로 군국주의가 일소됐다는 투의 보도를 쏟아냈습니다. 도조 히데키 본인 역시 사형 판결을 받고 “그 무엇보다 이 재판으로 천황폐하께 폐를 끼치지 않게 될 것이 명백해져서 안심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처형장으로 가기 직전 난징 대학살 주범인 마쓰이 이와네 육군대장 등과 ‘천황폐하 만세!’ ‘대일본제국 만세!’를 삼창하기도 했습니다. (▶관련기사: 도조 히데키 죽었지만, 일본 군국주의는 살아남았다)

히로히토 본인은 어땠을까요. 상징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1975년 10월 미국을 방문한 히로히토는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한 기자가 “전쟁 후 천황이 마땅히 졌어야 할 책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을 던지자 그는 “제가 문학 방면에 대해 공부한 적이 없어 말재간이 부족해 잘 모르므로, 대답할 수 없습니다”라며 동문서답했습니다. 전쟁 직후인 1945년 9월27일 맥아더와의 1차 회견에서 “전쟁의 모든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으로 나 자신을 맡기러 왔다”는 말을 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2014년 일본 궁내청이 공개한 ‘쇼와 실록’에서는 정작 이 말이 빠져 있습니다. 일본 정부 공식 기록에선 이 발언을 확인할 수 없었다며 히로히토의 발언으로 채택하지 않은 것입니다. (▶관련기사: ‘전범’ 히로히토 일왕에 ‘평화’ 이미지 입히기)

히로히토 전 일왕. <한겨레> 자료사진
히로히토 전 일왕. <한겨레> 자료사진
히로히토에 대한 일본의 태도는 1989년 사망 당시 공식 애도사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다케시타 노보루 당시 일본 총리는 애도사에서 “돌아가신 천황께서는… 격동의 62년간 세계 평화와 국민의 행복을 기원하고 몸소 실천하셨다. 폐하의 뜻과 달리 발발한 지난 대전으로 고통받는 국민을 차마 볼 수 없어 일신을 돌보지 않고 전쟁을 종결하는 영단을 내려주셨다”며 극찬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히로히토에게 책임을 묻지 못한 결과 지금껏 일본 사회가 제대로 된 과거사 반성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허버트 빅스는 책 <히로히토 평전-근대 일본의 형성>에서 이렇게 꼬집었습니다.

“천황이 심판받고 조사받지 않은 이상, 일본이 벌인 침략전쟁의 정당성, 곧 다른 아시아태평양 국가를 해방시키려고 침공했다는 믿음은 완전히 불식될 수가 없었다. 결국 다수 일본인은 천황과 공생관계에 있다. 천황이 책임을 지지 않았으므로 국민 전체가 스스로 책임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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