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도쿄 요코아미초 공원에서 열린 간토대지진 조선인희생자 95주년 추도식에서 시민들이 조선인 희생자 위령비에 줄을 서서 헌화하고 있다.
“간토대지진 때 군과 자경단의 폭력으로 소중한 생명을 빼앗긴 조선인을 필두로 수많은 희생자에게 깊은 애도의 뜻을 바친다. 학살 사건 배경에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의식과 조선을 식민지 지배한 일본인의 교만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름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1일 오전 도쿄 스미다구 요코아미초 공원. 예년의 갑절이 넘는 700명의 인파가 간토대지진 조선인희생자 95주년 추도식에 참석했다. 행사 마지막 순서인 추도비 헌화식 전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반성한 무라야마 담화(1995년)를 발표했던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의 메시지를 사회자가 대독했다. 무라야마 전 총리는 메시지에서 “일본인으로서 부끄러운 역사를 반성하고 아시아 이웃들과 공생사회를 실현하는 것에 사명감을 보이는 것이 전후 일본의 원점”이라고 지적했다. 이날 추도식에는 무라야마 전 총리뿐만 아니라 하토야아 유키오 전 총리, 일본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의 에다노 유키오 대표, 박원순 서울시장, 고이케 아키라 일본 공산당 서기국장의 메시지도 대독됐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차별의 연쇄를 끊고 우애 사회를 창조하지 않고선 일본의 미래, 아시아의 평화는 구축될 수 없다”고 했다. 박원순 서울 시장은 “100년 가까운 긴 세월 동안 일본 정부는 물론 한국 정부도 이 사건에 대해서 눈을 돌려왔다”고 지적했다.
지난해까지는 없었던 각계 주요 인사 추도 메시지가 올해 대거 발표된 데는 슬픈 이유가 있다.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가 역대 도쿄도지사들이 계속 보내오던 추도사를 지난해부터 보내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항하기 위한 조처였다. 이번 행사를 주도한 시민단체 중 한 곳인 일조(日朝)협회 도쿄도연합회의 미야키와 야쓰히코 회장은 “개인 9000명과 단체 140곳 이상 서명을 받아서 도쿄도에 추도문 송부를 요구했으나 도쿄도에서는 나중에 전화 한 통으로 거부 의사를 밝혔다”며 “회원 중 한명이 그렇다면 도쿄도지사 추도문을 대신할 만한 사람들의 메시지를 받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요코아미초 공원에는 간토대지진조선인희생자 추도비가 건립된 것은 지난 1973년이었다. 1923년 간토대지진 당시 일본에서는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고, 군경과 자경단이 조선인 6000명 이상을 학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50여년 뒤 도쿄 추도비 건립 움직임이 일자, 혁신 도정으로 유명했던 미노베 료키치 도쿄도지사가 이를 도왔다. 그는 비 건립 이듬해인 74년 “(당시) 비참한 행동은 지금도 우리 양심을 날카롭게 찌른다”는 추도문을 보냈고, 이후 보수적 인사로 유명했던 이시하로 신타로를 포함해 역대 도지사들 대부분이 추도문을 보냈다. 그런데 고이케 지사는 지난해 모든 간토대지진 희생자에 대한 추도의 뜻을 한꺼번에 표명하겠다며 조선인 희생자에 대해서만 따로 추도문을 보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올해 도쿄도청은 “앞으로도 보내지않겠다”고 조선인 학살 희생자 추도문 송부 거부를 일시적인 일이 아니라 기정사실화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스미다구청장도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추도문을 보내지 았다. 지난해에는 고이케 지시와 비슷한 이유를 대며 추도문 송부를 거부했는데, 올해는 거부 이유조차 밝히지 않았다.
미야카와 회장은 고이케 지사 추도문 거부에 대해서 “조선인 학살 역사에 대해서 눈을 돌리고 없었던 일처럼 만들려는 생각이 있는 게 아니겠느냐”며 “역사적 사실을 회피하는 것 자체가 더욱 부끄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1일 도쿄 요코아미초 공원에서 열린 간토대지진 조선인희생자 95주년 추도식에서 시민들이 조선인 희생자 위령비에 헌화 뒤 추도하고 있다.
이날 같은 요코아미초 공원에서 열린 간토대지진 희생자 추도 법요식에는 도쿄도 부지사가 참석했다. 부지사는 “유족 여러분에게 마음으로부터 추도의 뜻을 나타낸다“는 고이케 지사의 추도문을 대독했으나, 조선인 학살 희생자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장 옆에서는 보수단체 회원들이 “수천명 학살은 날조” “일본인의 명예를 지키자”는 펼침막을 내걸었다.
1일 도쿄 요코아미초 공원에서 열린 간토대지진 조선인희생자 95주년 추도식에서 전통 무용가 김순자씨가 희생자를 추도하는 춤을 추고 있다.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을 역사에서 지우려는 움직임에 대해서 일본 시민사회에서는 위기감이 적지 않다. 지난 7월부터 도쿄 신오쿠보에 있는 고려박물관에서는 ’묘사된 조선인 학살과 사회적 약자’라는 이름으로 전시가 열리고 있다. 전시회에는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에 소장된 채 좀처럼 전시가 되고 있지 않은 그림들이 전시되어있다. 아이들이 조선인을 찾아내는 놀이를 하거나 청각장애인이 조선인으로 오인돼 학살된 사건을 그린 그림 등 당시의 비참한 사건들이 묘사되어 있다.
도쿄/조기원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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