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의 다윈 공습으로 유류 저장고가 폭발하고 있다.
1942년 2월19일 아침, 오스트레일리아 북부 항구 도시 다윈의 상공에 일본 폭격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항공모함 4척에서 발진한 188대가 맹폭을 가해 오스트레일리아군을 포함한 연합군 병사 25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진주만 공습 2개월여 뒤 감행한 이 공격은 ‘오스트레일리아판 진주만 공습’으로 불린다. 일본군은 연합군 병참기지 역할을 하는 다윈 기지를 파괴해 동남아시아 침략의 장애물을 제거하려 했다.
16~17일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하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다윈을 찾는다. 패전 후 일본 총리로는 첫 방문이다. 아베 총리는 스콧 모리슨 오스트레일리아 총리와 전몰자 추도비를 방문할 계획이라고 일본 언론들이 전했다. <교도통신>은 아베 총리가 이번 방문으로 양국의 화해와 ‘전략적 파트너’ 관계를 강조하려 한다고 분석했다.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전략’을 내걸고 중국을 견제하려는 일본에게 오스트레일리아는 인도와 함께 핵심 파트너다. 일본 항공자위대와 오스트레일리아 공군은 내년에 일본 영토 안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연합훈련을 할 예정이다.
아베 총리는 2013년 국회에서 “침략의 정의는 학문적으로 국제적으로도 정해져 있지 않다”고 말한 역사 수정주의자다. 2015년 ‘아베 담화’에서는 “우리 아이들과 손자들에게 계속 사죄의 숙명을 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16년 태평양전쟁에서 전사한 미군 1만3천여명이 묻힌 하와이 호놀룰루의 국립태평양기념묘지를 방문해 묵념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그러나 아베 총리는 주요 승전국에는 적절히 고개를 숙여왔다. 2016년 하와이 진주만을 방문해 “전쟁으로 희생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혼에 영겁의 추도의 뜻을 바친다”고 말했다. 이런 모습은 다윈 방문에서도 재연될 것으로 보인다. 2015년 미국 의회에서는 “전후 일본은 지난 대전에 대한 통절한 반성을 가슴에 담고 역사의 발걸음을 이어왔다”고 연설했다.
일본 제국주의에 짓밟힌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서는 태도가 다르다. 아베 총리는 진주만이나 다윈은 찾지만, 아시아인들의 상처의 현장을 찾아 추도나 반성의 뜻을 나타낸 적이 없다. 2016년 아베 총리의 진주만 방문 때 중국 정부는 “깊이 반성하고 성실히 사죄할 생각이 있다면 중국에는 난징 대학살기념관 등 일본이 추도할 기회를 만들 장소가 많이 있다”고 꼬집었다.
아베 정부의 이중적 태도는 한-일의 갈등 소재로 부상한 강제징용 문제와도 맥락이 닿는다. 일본 정부와 일본 기업들은 태평양전쟁 당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기에 배상 문제를 달리 봐야 한다는 취지를 밝혀왔다. 그러면서도 일본의 반식민지였으며 전승국 지위를 지닌 중국에는 한국과는 또 다른 접근을 보여주고 있다. 미쓰비시머티리얼(옛 미쓰비시광업)은 2016년 일부 중국인 강제노동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화해금을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일본 정부의 의향이 반영된 움직임이다. 같은 미쓰비시 계열의 미쓰비시중공업은 한국인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을 거부해왔다. 일본 정부는 지난달 30일 한국 대법원의 신일철주금에 대한 배상 판결을 따르지 말라는 설명회를 열며 기업들을 단속하고 있다.
한편 일본은 최근 ‘인도·태평양 전략’에 대해 중국을 자극할 것을 염려하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고려해 ‘전략’ 대신 ‘구상’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미국과는 계속 ‘전략’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도쿄/조기원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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