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4일 일본 오사카 평화자유번영회관에서 열린 <조국이 버린 사람들>(김효순 저) 일본어판 출판기념강연회에서 강종헌 도오시샤대 겸임교수(오른쪽)가 재일동포 양심수 동료인 서성수 민단 고베 지부 사무부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오사카/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한통련이 북한 지원을 받는다면 이렇게 어렵게 안 지낸다. 10년간 간부로 일할 때 교통비가 없어 헤맬 정도였다.”
조근조근 말하던 강종헌(67) 도오시샤(同志社)대 겸임교수의 목소리가 이 대목에서는 단호해졌다. 11월23일 일본 오사카시 외곽 이시키리의 한 호텔에서 강 교수를 별도로 만나 인터뷰한 것은 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 경력 때문이었다. 그는 1990년부터 2000년까지 10년 동안 한통련 조국통일위원장을 지냈다. 이날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조작 피해자들은 재심 변호사와 <조국이 버린 사람들>의 저자(김효순) 등 도와준 사람을 초청해
재일 양심수들의 작은 사은행사를 가졌다.
?어떻게 한통련에서 일하게 됐나.
“1989년 일본으로 돌아와 있을 때 남북한과 해외동포들이 참가하는 범민족대회가 추진됐다. 평소 존경하던 문익환 목사님이 범민련대회 남쪽 준비위원장을 맡았는데 그 분을 도와 드리려고 범민련 해외본부 일을 시작했다.”
서울대 의대에 다니던 강종헌은 1975년 2차 ‘11·22 사건’(중앙정보부가 재일동포 유학생 등 20명을 간첩단으로 조작함)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13년 감옥에 있다가 1988년 12월 가석방됐다.
?범민련 일을 하는데 왜 한통련 간부를 맡았나.
“알다시피 범민련은 남쪽과 북쪽에 각각 본부가 있고, 해외본부가 따로 있었다. 일본에 있는 해외본부의 사무차장을 맡았다. 그런데 범민련 일을 하려면 개인은 안 되고, 소속단체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평소 가까이 지냈던 한통련에 적을 두게 됐다. 한통련은 조국통일위원회를 만들었고 내가 위원장이 됐다. 그 조직에는 위원장인 나만 있었다.(웃음) 범민련 해외본부는 한통련과 총련에서 각각 사람이 파견돼서 일했다. 요즘 개성공단 공동연락사무소와 같은 방식이다. 나는 범민련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때때로 한통련 본부에 가서 같이 회의하고 그랬다.”
?한통련 사정을 알텐데 의심스런 대목은 없었나.
“한통련이 북한과 연계됐다는 것을 나는 한번도 못 느꼈다. 그러면 없는 거다. 만일에 북에서 자금 지원을 받았다면 그 사람들이 그렇게 어렵게 안 지낸다. 당시에 나도 교통비가 없어서 헤맬 정도로 어렵게 활동했다. 지금도 아마 그 사람들 그럴 거다. 만약 북에서 키운 조직이라면 그렇게 놔두겠나. 아무리 1990년대에 기아선상에서 허덕였다고 하더라도 통일운동에는 자금을 줄 것 아니겠느냐. 그러나 그런 것이 없었던 것을 보면 조직적인 연계나 재정적인 연계는 없는 거다.”
?하지만 한통련에 대한 여러 차별과 탄압이 계속되고 있다.
“박정희 독재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민통(한통련의 전신) 의장으로 취임할 예정이었다가 납치되는 바람에 무산됐다. 그렇다면 반국가적 요소가 원래 전혀 없는 단체가 아니겠나. 일본에 살다보면 여러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한통련 안에서도 북에 대한 생각은 다양하다. 그러나, 한통련의 뿌리는 어디까지나 대한민국이다. 민주화 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국외 민주화운동 단체를 분단시대 냉전사고로 고립시키고 억압하는 게 말이 되나. 대한민국 사법부나 행정부에서 용단을 내려야 한다. 촛불로 만들어진 문재인 정부가 나서야 한다.”
뒤늦게 국제정치를 공부해 박사학위(와세다대)를 받은 강 교수는 자신이 겪은 얘기를 중심으로 <내가 겪은 한국현대사?교수대에서 교단까지>(2010년)을 썼다.
오사카/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