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오키나와현 구니가미군 기노자촌 소케이에서 구시켄 다카마쓰가 오키나와전 희생자로 추정되는 이의 두개골 일부를 들어보이고 있다. 기노자/조기원 특파원
“이건 두개골의 일부예요.”
15일 오키나와현 중부 기노자촌 소케이에서 구시켄 다카마쓰(65)가 땅속 1m에서 작은 뼈 한 조각을 꺼내 들었다. 그는 28살 때부터 오키나와전 때 희생된 유골 발굴 작업을 벌이는 시민단체 ‘가마후야’(동굴 파는 사람이라는 뜻)를 이끌어온 평화활동가다.
이날 유골 발굴 작업은 해수욕장으로 사용해도 될 만큼 아름답고 긴 모래사장이 펼쳐진 바닷가 바로 옆에서 진행됐다. 무성한 아열대성 나무로 이뤄진 숲을 헤치고 5분 정도 걸어 들어가자 발굴 현장이 나왔다. 작업 현장에는 숨진 사람 이름을 적어놓은 여러 장의 벽돌과 기왓장이 깨진 채 발견됐다. 사람을 묻었다는 표시로 가족 등이 세워놓은 벽돌로 추정된다. 구시켄은 “이후 가족들이 유골을 수습하면서 이를 표시하기 위해 벽돌을 일부러 깨뜨려놓았을 것”이라며 “조선인은 가족이 없어 유골이 그대로 방치된 경우가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키나와전은 일본이 패망을 앞둔 1945년 4월부터 6월 말까지 두달여에 걸쳐 이뤄진 무모한 전쟁이었다. ‘본토결전’을 위한 시간 벌기를 위해 일본인, 오키나와인은 물론 강제동원된 조선인과 대만인 등 약 20만명이 허무한 죽음을 당했다.
15일 오키나와현 구니가미군 기노자촌 소케이에서 구시켄 다카마쓰가 ‘나카자토 쓰루’라고 쓰인 벽돌을 보고 있다. 이전 유골 발굴 작업 때 나온 이 벽돌은 가족들이 희생자 매장 위치를 나타내기 위해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벽돌 윗부분이 깨져 있는데 이는 나중에 가족이 유골을 회수한 뒤 이를 나타내기 위한 흔적으로 보인다. 기노자/조기원 특파원
미군은 이날 발굴이 이뤄진 소케이에 오키나와 민간인들을 전쟁의 참화에서 보호하기 위한 ‘기노자 수용소’를 세웠다. 구시켄은 “민간인들은 수용소에서 미군에게 보호를 받았어야 했다. 하지만 식량 부족에 전염병 말라리아가 돌면서 많은 이들이 숨졌다”고 말했다.
이 수용소엔 약 3000명 정도가 수용돼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숫자는 파악되지 않는다. 수용자 대부분은 오키나와인이었지만, 조선인이 섞여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구시켄은 “오키나와전의 특징은 희생자 가운데 민간인이 많고, 정확한 사망 장소와 일시를 알기 힘들다는 점”이라며 “한반도 출신도 어디서 어떻게 희생됐는지 잘 파악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노자 수용소 같은 민간인 수용소는 1946년까지 오키나와 곳곳에 남아 있었다. 미군 민간인 수용소에 당시 오키나와 인구의 절반이 넘는 33만명이 수용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키나와전에선 적잖은 조선인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한 예로, 1945년 미국 <라이프>에 실린 오키나와 북부 모토부 묘표 사진에 ‘금산만두’(金山萬斗), ‘명촌장모’(明村長模) 등 창씨개명한 조선인임이 분명한 이름이 여럿 등장한다. 이들은 일본인 역사연구자 다케우치 야스토가 집대성한 조선인 강제동원자 명부를 통해 일본군 ‘군속’임이 확인된 바 있다.
남은 과제는 향후 조선인 유골이 발굴된다 해도 이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일본 정부는 2016년 4월 ‘전몰자 유골 수집 추진법’을 만들어 태평양전쟁 때 숨진 일본인 유골 수집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그러나 대상을 ‘우리 나라(일본) 전몰자 유골’로 한정했다. 그 때문에 일본 유족들은 자신들의 디엔에이(DNA)와 유골의 디엔에이 데이터를 대조해 유골을 찾아갈 순 있지만, 한국인은 그럴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한 한국 유족들의 항의가 잇따르는데도 일본 후생노동성은 “한국 정부로부터 구체적인 제안이 있으면 검토하겠다”는 입장만 반복하는 중이다. 오키나와에서 숨진 한국인 유골이 고국으로 돌아간 사례는 일본군에게 스파이로 몰려 학살당한 구중회(1977년 반환)씨뿐이다.
15일 오키나와현 구니가미군 기노자촌 소케이에서 한국인과 일본인, 대만인 참가자들이 오키나와전 희생자 유골 발굴 작업을 하기 위해서 땅을 파고 있다. 기노자/조기원 특파원
이날 기노자 수용소 유골 발굴 작업은 한-일-자이니치(재일동포) 시민들이 공동으로 개최한 ‘2019년 동아시아 공동워크숍’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일본인, 한국인, 자이니치, 대만인 등 30여명이 함께 삽을 들며 땀을 흘렸다.
오키나와 조선인 유골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오키모토 후키코도 “전쟁이 끝난 지 74년이 지났지만 많은 유골이 유가족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일본 정부는 전쟁에 대한 반성도 없다”고 말했다. 워크숍은 2015년 9월엔 ‘70년 만의 귀향’이란 이름으로 홋카이도의 한 절에 보관돼 있던 조선인 유골 115위를 고향으로 봉환한 바 있다.
기노자(오키나와)/글·사진 조기원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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