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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일본

헤이세이 30년…자신감 잃은 일본 ‘불관용의 사회’로 바뀌다

등록 2019-04-29 17:02수정 2019-04-29 21:00

아키히토 일왕 연호 헤이세이 종료 카운트다운
문구점에서는 헤이세이 프린트 파일 판매
스카이트리 일장기 조명 점등 등 각종 행사

일본인에게는 전후 평화의 시대였으나
세계 2위 경제 대국 물러난 국력 쇠퇴한 시기
자신감 상실은 사회적 보수화로 이어져
아베 정부 장기 집권의 토양으로 기능
아키히토 일왕 퇴위를 하루 앞둔 29일 도쿄 일왕 거처 주변에서 경찰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도쿄/로이터 연합뉴스
아키히토 일왕 퇴위를 하루 앞둔 29일 도쿄 일왕 거처 주변에서 경찰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도쿄/로이터 연합뉴스
아키히토 일왕 재위기인 헤이세이(平成·1989년 1월8일~2019년 4월30일)기의 끝을 하루 앞둔 29일 도쿄 다이토구에 있는 대형 문구점 시모지마에 들어서자 점포 맨 앞쪽에 ‘헤이세이’라고 큼지막하게 쓴 서류 보관용 파일이 진열돼 있었다. 파일 뒷면에는 이 시기에 일어난 주요 사건이 연도별로 빼곡히 적혀 있었다. <엔에이치케이>(NHK) 방송은 이날 아키히토 일왕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 <천황, 운명의 이야기>를 4편 연속 방영했고, 신문들도 지난 30년을 회고하는 특집 기사를 실었다.

헤이세이의 마지막 날인 30일엔 각종 기념행사가 열린다. 높이 634m인 도쿄의 명물 스카이트리에선 밤 10시부터 ‘고마워 헤이세이’라는 이름으로 일장기 모양의 빛을 전파탑에 비추는 행사를 한다. 도쿄 이케부쿠로 선샤인시티60빌딩 전망대에선 레이와(令和)로 연호가 바뀌는 자정에 맞춰 카운트다운 행사도 준비돼 있다. 일왕의 퇴위식은 오후 5시 도쿄 황거에서 열린다.

일본인들에게 헤이세이기는 ‘복잡한 시대’였다. ‘천지와 내외의 평화를 이룬다’는 뜻에 걸맞게 평화가 이어졌지만, 국력은 정점을 찍고 쇠퇴했다. <엔에이치케이>가 지난해 9~11월 성인 3554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복수응답 허용)에서 79%가 헤이세이기에 대해 ‘전쟁이 없고 평화로웠다’고 답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다’는 답은 40%에 그쳤다. <아사히신문>의 지난해 3~4월 설문조사에서도 ‘동요했던 시대’라는 응답이 42%로 가장 많았고, ‘침체된 시대’(29%)가 뒤를 이었다. ‘밝은 시대’라는 응답은 5%에 그쳤다.

29일 일본 도쿄 다이토구 문구점에서 ‘헤이세이’ 연호를 인쇄한 서류 파일을 판매하고 있다. 조기원 특파원
29일 일본 도쿄 다이토구 문구점에서 ‘헤이세이’ 연호를 인쇄한 서류 파일을 판매하고 있다. 조기원 특파원
한 50대 일본 언론인은 <한겨레>에 이 시기를 “평화로웠지만 행복하진 않았던 시대”라고 요약했다. 앞선 히로히토 일왕의 쇼와(昭和)기엔 전쟁의 아픔을 겪었지만, 1945년 패전 이후엔 고도 경제 성장이 이뤄졌다. 그 때문에 일본인들은 쇼와기를 희망으로 가득한 ‘긍정적 시대’로 기억한다. 일본은 전쟁을 부정한 평화헌법 아래에서 경제 발전에 치중하며 놀라운 성과를 이뤄냈다. 패전 후 불과 23년 만인 1968년 일본은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미국의 뒤를 잇는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했다.

헤이세이기에 접어들며 경제의 모순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거품 붕괴 직전인 1989년 12월29일 닛케이지수는 3만8915까지 치솟았지만, 30년이 흐른 29일 현재 2만2000대에 머물고 있다. 경제 규모는 2010년 중국에 밀려 3위로 내려앉았다.

일본 기업인들은 헤이세이기의 경제를 ‘패배’란 한 단어로 정리한다. 경제 3단체 중 하나인 경제동우회의 대표간사 고바야시 요시미쓰는 잡지 <분게이쥬> 4월호 ‘헤이세이 일본 경제는 패배의 시대였다’는 글을 실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일본은 차세대 통신 규격인 5세대(5G) 통신 등에서 미·중 기업들에 지고 있다며 “기간 기술을 미국, 유럽, 중국에서 들여오지 못하면 산업과 사회가 설 자리가 없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인구 역시 저출산의 영향으로 2008년 1억2808만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10년째 줄고 있다. 이 시기는 한신대지진(1995), 옴진리교 사건(1995), 동일본대지진(2011) 등 사건·사고로 얼룩진 시기이기도 했다.

경제 부진이 이어지며 일본 사회는 내향적으로 변했다. 방송에선 일본 제품과 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프로그램이 유행하고 있다. 한 30대 일본 회사원은 “동일본대지진 이후 부쩍 ‘일본은 대단해’라고 치켜세우는 프로그램이 늘었다. 예전엔 반대로 해외여행을 다룬 프로그램이 많았다”고 말했다.

이런 흐름을 이끄는 인물이 2012년 12월 재등장한 아베 신조 총리다. 아베 총리는 ‘일본을 되돌려놓겠다’는 구호를 내세워 재집권한 뒤 일본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애국주의 교육을 강화했다. 아베 정권에 비판의 날을 세우는 나카노 고이치 조치대 교수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일본 정치가 과거의 ‘이익(배분)’에서 ‘아이덴티티’(정체성)를 강조하는 형태로 옮겨갔다”고 진단했다. 그로 인해 일본 사회엔 ‘헤이트 스피치’로 상징되는 배외주의적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교도통신>의 지난달 조사를 보면, 일본인 57%가 헤이세이기를 타자에 대해 ‘불관용적으로 된 시대’라고 답했다.

도쿄/조기원 특파원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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