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일본 도쿄 ‘황거’에서 나루히토(가운데) 새 일왕이 즉위 첫 발언을 하고 있다. 도쿄/지지 연합뉴스
1일 오전 10시30분. 새 일왕 나루히토(59)가 시종들의 안내로 전날 부친 아키히토 상왕의 퇴위식이 열린 도쿄 ‘황거’ 마쓰노마(소나무의 방)로 입장했다. 연미복에 일본 최고위 훈장인 대훈위국화장경식을 매단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새 일왕이 연단에 서자 시종들이 일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3종의 신기’(거울·칼·곡옥)를 들고 입장했다. 칼인 ‘구사나기노쓰루기’, 곡옥인 ‘야사카니노마가타마’, 국새·어새를 받쳐든 시종들은 90도 절을 한 뒤 이를 ‘안’이라 불리는 안치대에 올려놨다. 일왕은 무언의 미소로 인사를 받았다. 극도의 침묵 속에 진행된 ‘겐지토쇼케이노 기’(검과 도장을 물려받는 의식)란 이름의 즉위식에 걸린 시간은 5분 남짓이었다. 아베 신조 총리, 각료들, 지방자치단체 대표들, 남성 왕족들이 참석했으나 마사코비 등 여성 왕족은 왕실전범 탓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 행사를 끝으로 나루히토 일왕의 레이와(令和) 시대가 공식적으로 막을 올렸다.
새 일왕은 오전 11시10분 같은 장소에서 열린 ‘소쿠이고초켄노 기’(즉위 후 처음 신하를 만나는 의식)에서 국민들을 향한 첫 메시지를 내놨다. 이번엔 마사코 왕비도 함께였다. 아베 총리의 짧은 답사가 이어졌다. 일왕과 아베 총리의 인사말을 곰곰이 뜯어보면, 레이와 시대 일본의 앞날에 대한 두 사람의 생각이 묻어 있다. 엄격한 예식에 사용되는 짧고 정제된 문장 속에 자신들의 생각을 비교적 명확히 담았기 때문이다.
먼저 일왕은 “상황 폐하(아버지 아키히토 전 일왕)는 즉위 30년 이상 긴 세월 동안 세계의 평화와 국민의 행복을 바라고 어떠한 때에도 국민과 고락을 함께했다. 상황 폐하가 제시한 상징으로서의 모습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이어 “상황 폐하의 지금까지 행보를 깊이 생각하며 항상 국민에게 다가서겠다”고 했다. 아버지가 확립한 상징일왕의 길을 충실히 따르며, 국민에게 다가서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아키히토 상왕은 재해 현장 등을 구석구석 다니며 국민과 일대일로 대화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이재민들 앞에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추는 모습을 통해 감동을 줬다.
헌법과 관련해 아키히토 상왕은 30년 전 즉위 때 “여러분과 함께 일본국 헌법을 지키고 이에 따라 책무를 다할 것을 맹세한다”고 했다. 국가 교전권을 부인하고 군대 보유를 금지한 평화헌법의 수호 의지를 느낄 수 있는 한마디였다. 이에 견줘 나루히토 일왕은 “헌법에 따라 일본국과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 책무를 다할 것을 맹세하며, 국민의 행복과 국가의 발전, 그리고 세계의 평화를 간절히 희망한다”는 표현을 썼다. 비슷한 뜻으로도 들리지만, 아키히토 상왕이 평화헌법에 대해 ‘지킬 수(守)’ 자를 쓴 것과 이번 나루히토 일왕의 표현은 차이가 있다.
아베 총리는 “우리는 천황 폐하를 국가와 국민의 통합으로 모시고 격동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평화롭고 희망차고 자긍심이 있는 일본의 빛나는 미래, 사람들이 아름답게 마음을 모으는 가운데 문화가 생겨나 육성되는 시대를 만들 것을 결의한다”고 말했다. 중국의 부상과 북한 핵무장을 염두에 둔 듯 ‘격동하는 국제 정세’란 표현을 사용한 점이 눈길을 끈다. 일본의 복고적 가치와 전통을 중시하는 우익들의 용어인 ‘자긍심’, ‘빛나는’, ‘사람들이 아름답게 마음을 모으는’ 등의 표현도 썼다. 이는 자민당의 소장파 우익 의원이던 아베 총리가 2006년 전후 최연소 총리로 오르며 펴낸 책 <아름다운 나라로>에 담은 세계관이기도 하다. 이에 비해 일왕이 사용한 표현은 ‘국민의 행복’, ‘세계 평화’ 등이다.
이날 일본인들은 아침부터 새 일왕이 그동안의 거주지인 도쿄 미나토구 아카사카에서 ‘황거’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연도에 늘어섰다. 일장기를 흔들며 “축하합니다”라고 말하거나 ‘만세’를 외치는 이도 있었다.
새 일왕 즉위에 따른 축하 행사는 올해 내내 계속된다. 4일에는 일왕 부부가 황거 테라스에 나와 국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10월22일엔 새 왕의 즉위를 대내외에 알리는 행사를 한다.
한편 문재인 대통령은 새 일왕에게 보낸 축전에서 “퇴위한 아키히토 천황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면서 평화를 위한 굳건한 행보를 이어나가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도쿄/조기원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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