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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일본

유산 없는 최장수 총리 아베, 오른쪽으로 쏠린 일본 남겼다

등록 2020-09-06 08:15수정 2020-09-06 09:03

[토요판] 뉴스분석
아베 총리의 정치적 유산

“뚜렷한 레거시 없다” 평가에도
선거 때는 ‘아베노믹스’ 강조
선거 없을 때 우파적 정책 추진

“필생의 과업” 헌법개정 못했어도
아베 총리 재임 중 더욱 우경화
지난달 28일 일본 도쿄 신주쿠에서 시민들이 대형 전광판에 비친 아베 신조 총리 사임 발표 중계 화면을 보고 있다. 도쿄/EPA 연합뉴스
지난달 28일 일본 도쿄 신주쿠에서 시민들이 대형 전광판에 비친 아베 신조 총리 사임 발표 중계 화면을 보고 있다. 도쿄/EPA 연합뉴스

지난달 전격 사임을 발표한 아베 신조 총리가 남긴 정치적 유산은 무엇일까? 똑 떨어지는 답은 떠오르지 않는다. 아베 총리는 일본 헌정사상 최장수 총리라는 기록을 세웠지만 역대 다른 장수 일본 총리와 비교해보면 뚜렷한 “레거시”(유산)가 없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다. 이케다 하야토 총리의 고도경제성장, 사토 에이사쿠 총리의 오키나와 반환,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의 국철·일본전신전화공사·일본전매공사 민영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일본우정공사(우체국) 민영화처럼 일본인들 머리에 확 떠오르는 정치적 유산이 없다는 지적이다. 아베 총리가 “필생의 과업”이라고 말했던 헌법 개정을 하지 못했음은 물론이고 “전후 외교의 총결산”이라며 추진했던 러시아와의 평화조약 체결 교섭이나 “정권의 최우선 과제”라는 일본인 납북자 문제 해결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2차 집권기에는 완급 조절

2012년 12월부터 시작된 아베 2차 정권이 7년8개월간 지속된 비결은 아베 총리가 선호한 우파적 성향의 정치적 결과물 내기에만 줄곧 매달리지는 않은 데 있을지도 모른다. 아베 총리는 2006년 전후 최연소인 52살로 총리에 오른 뒤 교육기본법 개정 같은 보수적 정책에 치중했고 각료들의 망언과 정치스캔들까지 겹쳐, 1차 집권은 1년 단기로 끝났다. 그는 2007년 9월10일 국회 소신표명 연설 때 “직무를 완수하겠다”고 말했다가, 이틀 뒤인 9월12일 전격 사임을 발표해 “정권을 내던졌다”는 비난을 받았다. 당시에는 정치 생명이 끝난 것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2012년 12월 또다시 총리에 등극한 이후에는 정권 운영에 완급을 조절했다. 2차 집권 초기 대규모 금융완화를 뼈대로 하는 ‘아베노믹스’를 추진하며 일본인들의 실생활과 직결되는 경제정책에 집중했다. 일본 유효구인배율(구직자 1명당 일자리 수)은 집권 초기인 2013년 4월 0.88에서 후기인 2018년 3월 1.59로 뛰어올랐다. 아베노믹스에 대해 실질적 소득 증가가 없어서 경기 회복을 실감하지 못한다는 비판도 끊이지 않았지만, 취업시장 훈풍은 젊은이들의 아베 정권 지지로 연결됐다는 분석이 많았다.

올해 상반기까지 일본 특파원을 하면서 자민당 선거 유세를 보다 보면 헌법 개정 같은 이데올로기적 정책에 대한 호소가 예상보다 적다고 느낀 적이 많았다. 지난해 7월20일 참의원 선거 투표 하루 전날 도쿄 아키하바라 선거 유세장에 갔을 때의 일이다. 마이크를 잡은 아베 총리는 집권 기간 경제적 성과에 대해 주로 이야기했으며, 헌법 개정 의욕은 중간에 잠시 언급하는 정도였다. 그나마 2017년 중의원 총선 마지막 유세 때보다는 발언 분량이 늘었다. 당시 아베 총리가 “입으로는 무슨 말을 못 하느냐. 우리는 실행을 해왔다”며 옛 민주당 정권을 비판하며 목소리를 한껏 높였던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지난해 7월15일 도쿄 긴자에서 열린 참의원 선거 유세 때 마이크를 잡은 아마리 아키라 당시 자민당 선거대책본부장은 “인터넷 (검색은) 구글이고 쇼핑은 아마존으로 많이 하죠? 요즘은 ‘메이드 인 재팬’이 별로 없어요. 미국, 중국, 한국제들이 많아요”라며 좋았던 시절 일본의 향수를 자극하는 내용으로 연설했다. 일본 유권자들의 주요 관심과는 거리가 먼 헌법 개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아베 정부는 2012년 말 재집권 이후 선거가 없을 때는 헌법 개정 같은 이념적 성향이 짙은 정책을 추진했지만 선거 때는 일본 유권자 주요 관심사인 경제정책 홍보에 집중하는 패턴을 보였다. 우치야마 유 도쿄대 대학원 총합문화연구과 교수(일본정치·비교정치)는 지난해 말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아베 정부는 소비세율 인상이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안보법제 제·개정 같은 (인기가 없는) 정책은 선거가 없을 때 추진했다”며 “아베 정부는 쟁점 다루기에 매우 능숙하다. 국민의 반발을 살 만한 정책은 선거 때 내세우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지난달 28일 총리 사임을 발표하면서 “헌법 개정 뜻을 이루지 못하고 (총리)직을 떠나게 돼서 창자가 끊어지는 듯 괴로운 마음”이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러나 아베 총리는 일본 정치의 좌표 축을 오른쪽으로 더욱 옮기는 데 성공했다. 나카노 고이치 조치대 국제교양학부 교수(비교정치)는 <우경화하는 일본 정치>라는 책에서 현대 일본 정치를 축에 매달린 진자에 비유해 설명했다. 축 자체가 오른쪽으로 옮겨가면 축에 매달린 진자가 좌우로 흔들린다고 해도 원래 위치보다는 결국 오른쪽으로 이동한다. 일본 현대 정치는 축 자체가 수십년 동안 오른쪽으로 이동해왔기 때문에 현재의 보수는 과거의 보수보다 우경화 경향이 일어난다는 설명이다. 나카노 교수가 특히 주목하는 시기는 1997년이다. 1995년 무라야마 담화 발표 그리고 1996년에 1997년도부터 사용하는 모든 중학교 교과서에 ‘위안부’ 문제가 기술됐다는 사실이 보도된 일을 계기로, 1997년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발족하는 등 ‘백래시’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진단한다.

1993년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됐던 아베는 백래시 소장파 기수로 성장했다. 아베 총리는 2차 정권 때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검증한다며 사실상 고노 담화의 “뼈를 발랐”고 2014년 집단적 자위권 행사 허용 헌법해석 변경, 2015년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안보법제 제·개정을 했다. 헌법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자위대 활동 범위 확대를 위한 법적 기반 구축은 끝냈다. 이는 대중국 견제를 위해 아시아에서 자위대 역할 확대를 원하는 미국의 지지를 받았다. 이를 배경으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2016년 5월 피폭 지역인 히로시마를 미국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방문했고, 같은 해 12월 아베 총리가 현직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하와이 진주만을 찾았다. 일본 원로 언론인 다하라 소이치로는 최근 주간지 <아에라>와 한 인터뷰에서 “(아베 총리) 제1의 레거시는 안보법제 개정”이라고 말했다. 다하라는 미-일 안보조약에서 일본이 미국과 좀 더 대등한 위치에 서야 하며 주일미군지위협정도 개정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이런 발언을 한 것으로, 안보법제 제·개정이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지난해 7월20일 저녁 도쿄 아키하바라역에서 열린 자민당 참의원 선거 유세 현장에서 한 시민이, 아베 신조 총리 1차 정권 때인 2007년 사임 당시의 소식을 전한 신문기사를 스크랩한 손팻말을 들고 있는 모습. &lt;한겨레&gt; 자료사진
지난해 7월20일 저녁 도쿄 아키하바라역에서 열린 자민당 참의원 선거 유세 현장에서 한 시민이, 아베 신조 총리 1차 정권 때인 2007년 사임 당시의 소식을 전한 신문기사를 스크랩한 손팻말을 들고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자민당 지지율은 여전히 압도적

일본에 특파원으로 체류한 3년3개월간 각종 집회에서 “아베는 사임하라” “지금 즉시 그만둬라” 같은 구호를 자주 들었지만, 아베 총리 사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아베 내각 지지율은 일본 정부가 아베 총리 쪽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사학법인에 특혜를 줬다는 의혹인 ‘모리토모·가케학원 스캔들’로 2017년과 2018년에 급락한 적이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회복하곤 했기 때문이다.

강력했던 아베 총리도 급속한 건강 악화와 코로나19 감염 확산으로 인한 정치적 타격으로 퇴장의 길을 밟았다. 하지만, 그가 총리직에서 떠나도 이미 축이 오른쪽으로 한참 더 이동한 일본 정치가 다시 왼쪽으로 이동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지난달 12일 발표된 <엔에이치케이>(NHK) 여론조사에서 아베 내각 지지율은 34%로 2012년 2차 정권 출범 뒤 이 방송사 여론조사 기준으로 최저였다. 한편, 정당 지지율을 보면 자민당 지지율이 35.5%인 데 반해서,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 지지율은 4.2%에 그쳤다. 자민당 외에 대안을 찾기 힘들다는 정서는 아직 뿌리 깊다.

조기원 기자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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