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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어 다르고 도다리 다르다

등록 2011-04-27 13:16

» 한겨레21 고나무 기자
» 한겨레21 고나무 기자
한겨레21
[입만 살아가지고] 도전 도다리 회뜨기

클리셰(상투어)는 기자의 마취약이다. ‘마약’이라고 쓰려다 ‘마취약’이라고 고친다. 구하기 쉽지만 효과는 저열하기 때문이다.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표현을 달고 사는 신문기자라고 솜방망이를 맞아봤겠나. 나 역시 숱하게 ‘봇물 터지듯’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봇물이 터지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클리셰는 다행히 대안이 존재한다. ‘광어 다르고 도다리 다르다’고 바꿔 말해도 무방하다. 동네 횟집에서 흔하게 사먹을 수 있는 두 생선 모두 가자미목에 속한다. 광어는 넙칫과, 도다리는 가자밋과지만 납작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눈이 영 똑같다. 얼굴을 바라보았을 때 눈이 왼쪽에 있으면 광어, 오른쪽이면 도다리다. 이른바 좌광우도. 봄철 생선 도다리회는 쫄깃한 식감이 최고다.

그러나 4월11일 저녁 목장갑에 튄 피냄새에 질겁하느라 좌광우도 따위는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몇 시간 전까지 서울 마포 농수산물시장에서 펄떡이던 녀석이다. 20cm 크기의 도다리를 고르며 “숨만 끊어달라”고 했다. “뭐… 해요?” 가게 주인이 아직 팔딱거리는 도다리를 봉지에 넣으며 무심하게 묻는다. “(당신) 뭐(하는 사람이기에 회 안 뜨고 그냥 달라고) 해요?”라는 말이렷다. “요리에 관심 있어서 회 한번 쳐보려고요, 흐흐.”

자신감도 있었다. 지난해 참돔을 회 친 몸이시다. 마트에서 2만7천원을 주고 산 회칼은 믿음직스러웠다. 싱크대에서 검은 봉지를 끌렀다. 무심코 코를 훔치자 벌써 손가락에서 비린내가 진동했다. 전날 미리 봐둔 블로그에서 광어 회치기 동영상을 다시 켰다. 모양이 비슷하니 회 치는 법도 비슷하리라 생각했다.

동영상을 보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광어 머리를 친다 → 핏물을 물로 씻는다 → 꼬리가 내 앞으로 오도록 두고 등뼈에 칼집을 낸다 → 왼쪽 살집부터 회칼 칼끝을 세워 뼈와 살을 분리한다.’ 동영상을 정지시키고 싱크대에 섰다. 심호흡을 하고 회칼을 집었다.

목장갑에서 비릿한 냄새가 번졌다. 엄지와 검지가 벌써 뻘겋다. 정확히 2년 전 봄 새벽 서울 마장동 축산물시장에서 핏물이 떨어지는 사분도체(4등분한 소의 일부)를 헤집고 다닐 때 맡은 그 냄새였다. ‘내 혀를 위해 너를 죽여야 한다’는 현실감이 목장갑을 통해 전해져왔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등뼈에 칼을 대기도 전에 도다리 꼬리를 놓친 게 세 번이었다. 닭의 목을 쳐도 근육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회칼을 댈 때마다 머리 잘린 도다리의 등뼈 수십 개 하나하나가 꿀럭거리는 질감이 목장갑 너머로 전해져왔다. 질겁하며 꼬리를 놓칠 때마다 식은땀을 훔치며 ‘쪽팔리게 남자가…’란 혼잣말로 이겨내야 했다.


지난해 참돔을 손쉽게 회 쳤던 건 숨을 끊고 나서 하룻밤 묵혀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광어와 도다리의 차이는 ‘아와 어’의 차이보다 10배는 컸다. 광어 회치기 동영상은 도다리 회치기에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1시간 동안 낑낑거리며 2kg 도다리를 해체했는데 회는 한 접시도 채 얻지 못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클리셰를 대신할 표현 하나는 건졌다. 매달 같은 회사에서 글값을 받는 내 인생이 클리셰일 뿐.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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