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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빼닮은 세 개의 가난

등록 2011-05-11 11:57

» 잭 런던이 찍은 이스트엔드 거리는 “무기력하고 상상력이 없으며 절망적이다”. 가난한 이들이 빵 한 조각을 사려고 내다판 헌 옷가지가 노점에 쌓여 있다. (궁리 제공)
» 잭 런던이 찍은 이스트엔드 거리는 “무기력하고 상상력이 없으며 절망적이다”. 가난한 이들이 빵 한 조각을 사려고 내다판 헌 옷가지가 노점에 쌓여 있다. (궁리 제공)
한겨레21
[출판] 산업혁명 이후 영국 런던, 생활고에 내몰린 도시 빈민의 참상을 그린 잭 런던의 르포르타주 <밑바닥 사람들>

“사람들은 가난한 가족이 밥해 먹고 잠자는 데 방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방 두 개짜리를 보여달라고 하자 임대인들은 밥을 더 달라고 하는 올리버 트위스트를 보듯 나를 보았다. …위생상태는 엉망이었다. 하수시설은 미비했고, 트랩은 고장나 있고 환기장치는 조잡하고 습기가 가득하여 전반적으로 불결했다.”(<밑바닥 사람들> 잭 런던 지음, 정주연 옮김, 궁리 펴냄, 32~34쪽)

“산업도시를 걸어다니다 보면 그을음을 뒤집어쓴 작은 벽돌집들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곤 한다. 이런 집들은 진창투성이 골목길과 석탄재 깔린 좁은 뜰가에 무질서하게 늘어선 채 쇠락해가고 있다. …더운 물이 나오도록 되어 있는 집은 단 한 채도 없다.”(<위건부두로 가는 길>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 69~70쪽)

“이것은 쓸쓸한 사연이 아니다. 4천여 가구에 줄잡아 1만여 명의 빈자가 모여 사는 이곳에서 그것은 너무 흔한 인생이다.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에는 그런 사연 1만여 개가 희뿌옇게 모여 있다. …사람을 위한 것이 비닐하우스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비가 오면 그대로 집 바닥에 떨어졌다. 용변은 더러운 공동 화장실에서 해결했다. 몸을 씻으려면 공동 수도에서 물을 길어와야 했다.”(<한겨레21> 803호 표지이야기 영구빈곤 보고서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너무 힘들다’)

공장의 부흥에 반비례하는 노동자 복지

여기 세 개의 기록이 있다. 맨 앞의 것은 1902년 런던의 빈곤지역 이스트엔드에 잠입해 도시 빈민을 ‘체험’한 잭 런던의 것이다. 뒤의 것은 1936년 잉글랜드 북부지방 일대의 탄광지대에 머물며 조사 활동을 한 조지 오웰의 것이다. 셋째는 2010년 한국, <한겨레21>의 영구임대아파트에 대한 기록이다. 첫째와 둘째 기록 사이에 30여 년 세월이 흘렀지만 두 지역의 모습은 꼭 닮아 있다. 주택은 부족하고 위생상태는 엉망이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이 절망적일 것임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100여 년이 지난 한국의 모습은 100년의 터울이 무력하도록 고스란히 빼닮았다.

국내에 <강철 군화> <야성의 부름> 등의 소설로 알려진 잭 런던의 르포르타주가 국내 초역됐다. 제목은 직설적이다. <밑바닥 사람들>(The People of the Abyss). 19세기 말, 산업혁명을 ‘앓고’ 있는 영국의 도시 빈민가를 묘사한다.

19세기 말의 런던은 모순이 가득 찬 도시였다. 산업혁명 뒤 영국에서
&raquo; <밑바닥 사람들> 잭 런던 지음, 정주연 옮김, 궁리 펴냄
» <밑바닥 사람들> 잭 런던 지음, 정주연 옮김, 궁리 펴냄
자본가들은 그야말로 호황을 맞았다. 인간의 생산력을 100배 향상시켰으니 돈이 흐르지 않으면 이상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자본은 고르고 넓게 퍼지지 않았다. 한쪽 방향만을 향해 흘러갔다. 영국 런던의 웨스트엔드가 그 수혜를 받은 이들이 모여사는 곳이었다. 도시는 부유하고 번성했으며 사람들이 입은 옷과 먹는 음식은 모두 반짝거렸다. 그러나 반대편 이스트엔드는 ‘부’의 대척점에 놓인 지역이었다. 이민자, 불법체류자, 하급노동자로 채워진 거리, 런던에서 가장 가난한 곳, 직장을 잃은 이들이 슬금슬금 모여드는 곳, 부랑자 수용소 앞에 긴 줄이 늘어서는 곳. 5명이 1천 명의 빵을 만들 수 있게 됐는데도, 굶주리는 이는 더 늘어난 어리둥절한 도시였다.


이들은 왜 벌이와 건강과 가족을 잃고 반짝이는 도시 속의 음습한 골목을 헤매야 했을까. 당시 런던의 노동구조가 그랬다. 기계에 자리를 내주고 일자리를 잃은 솜씨 좋은 직공들과 싼값에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여성과 아동이 공존했다. 노동자는 기계처럼 혹사당하다 고장나면 가차없이 버려졌다. 산업재해를 당해도 회사는 외면했다. 노동운동이라도 할라치면 일자리를 잃거나 심하면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예컨대 댄 컬런. 댄 컬런은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는 노동자의 처참한 말로를 보여주는 표본이었다. 그는 ‘항만 대파업 주동자’였다. 잭 런던이 그가 살던 시영주택에 찾아갔을 때, 댄은 집을 비운 채 구빈원 극빈자용 침대에 누워 죽어가고 있었다. 댄의 집은 가로 2.1m, 세로 2.4m에 천장은 너무 낮았다. 그 좁은 공간에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가구들이 놓여 있었다. 댄은 하층민 계급을 타고났다. 평생 고된 육체노동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성실하고 명민한 노동자였다. 책을 가까이하기 시작한 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다. 그는 자신에게 “변호사처럼 글을 쓸 수 있는” 재능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과일 운반인들의 지도자가 됐고, 런던 노동조합회의에서 부두노동자를 대표했다. 이 강철 같은 노동자에게 낙인이 찍혔다. 요주의 인물이 된 그는 일터에서 차별대우를 받고 가난과 굶주림에 심장병을 얻었다. 좁고 끔찍한 집에 혼자 앓아 누웠다. 의지할 일가친척도, 보러 오는 이도 없었다. 벽에 걸린 가리발디, 엥겔스, 댄 번스만이 가련한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있었다.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노동자는 순식간에 길거리로 내몰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부랑자 처지가 됐다. 이스트엔드에는 그런 이들의 이야기, 생활고를 비관한 전직 노동자의 자살과 살해, 늙고 힘없는 노파의 죽음 등의 사연이 먼지보다 더 많이 떠다녔다.

시공간을 넘어 대물림된 가난

예상한 것보다 훨씬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에 목이 죄인 잭은 한밤중 런던 국회의사당에서부터 워털루 다리까지, 템스 강변을 걸으며 27세기 전 욥이 말한 고통을 떠올렸다. “가난한 이들을 길에서 내쫓으니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은 죄다 숨을 수밖에. 그들은 광야의 들나귀처럼 먹이를 찾아서 일하러 나가네. …그들은 들에서 꼴을 거두어들이고 악인의 포도밭에서 남은 것을 따들이네. 알몸으로 밤을 지내네. 옷도 없이, 추위에 덮을 것도 없이.”(<욥기> 24장 2-10절 중)

잭은 한숨을 쉰다. “27세기 전이라니! 오늘날 에드워드 7세가 다스리는 기독교 문명의 심장에 딱 들어맞는 상황인데.” 그리고 거기서 2세기를 더 보탠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도 한숨을 쉰다. 19세기 말이라니! 100년도 더 지난 한국의 어느 도시가 앓는 신음과 딱 맞는 상황인데.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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