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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의 <끝나지 않는 노래>

등록 2012-02-15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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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박미향
한겨레21
[KIN] [책장 찢어먹는 여자] 국밥의 추억

최진영의 소설 <끝나지 않는 노래>(한겨레출판 펴냄)를 읽었다. 이야기는 1927년 내성면 두릉골에서 태어난 두자에서 시작해 그의 쌍둥이 두 딸 수선과 봉선, 수선의 딸인 대학생 은하와 봉선의 아들 동하에게로 이어진다. 누군가에 의해 삶이 결정되고 결국 그것을 묵묵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들의 이야기가 192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묵직한 이야기의 틈바구니에서 소설의 중반 무렵부터 내내 돼지국밥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런 문장들 때문이다. “수선은 봉선의 손을 잡고 국밥집에 들어가 돼지국밥 두 개를 시켰다. …봉선이 투덜거렸다. 수선은 말없이 뜨거운 국밥을 마구 떠먹었다. … 힘겹게 돌아가는 선풍기의 파란 날개. 더운 바람과 흙먼지. 비슷한 유니폼을 입은 남자들. 땀에 전 얼굴과 겨드랑이. 쨍쨍한 여름 햇살.” “니 이런 거 처음 먹어보제. 휴지로 입 언저리를 닦으며 수선에게 물었다. 수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22살 여름, 나도 부산의 돼지국밥집 한켠에서 “니 이런 거 처음 먹어보제”를 들었던 듯싶다. 푹푹 찌는 가게에서 뜨끈한 밥을 더 뜨거운 국에 말아먹으며 땀을 졸졸 흘리던 기억, 소주가 맥주처럼 시원해 꿀꺽꿀꺽 마시다 한밤중처럼 취해버렸는데, 여름해는 아직도 지지 않고 뉘엿뉘엿 게으름을 피우고 있던 저녁 풍경 따위가 머릿속을 채웠다. 슬퍼할 일도, 걱정할 거리도 없었고, 일상이란 고단한 것임을 상상치도 못했던 20대 초반의 여름밤들이 생각났다.

대학에 입학해 세 번째 여름방학을 맞은 나는 처음으로 통째 고향집에서 방학을 보내기로 했다. 이전 방학에는 무얼 했나. 기숙사에서 늘어지게 자고도 낮 시간을 내내 좁은 침대 위를 뒹굴다 해 질 무렵 룸메이트와 학교 앞 맛집 탐방에 나서거나(부질없다), 남자 많은 학교에 교환 계절학기를 들으러 가거나(그냥 남자만 많더라), 인도 배낭여행을 다녀왔다(번뇌만 얻어왔다). 부모님은 시간 그만 축내고 내려와 지내라 했다.

방학 때 고향집에 내려온 대학생이 흔히 그러듯, 고등학교 동창 몇을 만나 학교 다닐 적 얘기를 깔깔대며 며칠 풀어내고 나니 더 할 말도, 더 할 일도 없었다. 그러던 중 온라인의 광활한 대지를 유목민처럼 떠돌다가 발견한 것이 토익 스터디였다. 매주 두세 번씩 만나 문제풀이를 하는 모임이었다. 게으른 딸을 한심해하는 엄마의 잔소리가 점점 몸을 불려가던 때였다. 이거다 싶었다.

남자 여섯, 여자 셋이 모였다. 과연 우리는 매주 성실하게 만나 문제를 풀었다. 그런데 너무 자주 만나 금세 친해진 탓인지, 맥주 마시기 가장 좋은 계절이었던 탓인지 우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뒤풀이를 명목으로 술을 마셔대기 시작했다. 문제풀이의 시간은 점차 줄어들었고, 뒤풀이는 깊은 밤 할머니의 옛이야기처럼 굽이굽이 이어졌다. 그해 여름, 나는 처음으로 돼지국밥을 맛봤고, 인생을 통틀어 가장 빈번히 돼지국밥을 들이마셨다. 우리는 자주 국밥집에서 1차를 시작했고, 든든하게 속을 채운 덕분인지 맥줏집으로 이어지는 2차는 끝이 보이지 않곤 했다.

방학이 끝날 무렵, 토익 점수는 단 1점도 오르지 않았다. 대신 스터디를 할 때마다, 국밥집에서, 맥줏집에서 유독 옆에 앉았던 한 남자와는 스터디가 끝나고도 종종 만나 국밥을 말아먹었다. 설렁탕은 싫어하면서 누린내 쿰쿰한 돼지국밥은 맛있게 먹는 그 남자가 신기해 나는 문득문득 들여다보았다. 그때는 몰랐지,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남자와 숱한 국밥을 나눠먹게 될 줄은.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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