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나원준|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경제학 수업에서는 우화 속 완전경쟁시장을 배운다. 그것이 현실에 존재해서가 아니다. 그런데 경제학자들은 최저임금을 이야기할라치면 우화를 현실로 둔갑시킨다. 완전경쟁시장 수요 공급의 단순 논리로 최저임금을 비판한다. 내면화된 시장원리주의의 신념이 더해진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일자리가 줄었다는 주장은 그렇게 확실한 근거도 없이 유행했다. 올여름 재연되는 논란도 다르지 않다.
우선 최저임금의 취지부터 분명히 하자. 그것은 시장이 해결 못 하는 저임금노동자 가구의 빈곤 문제에 국가가 개입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것이다(최저임금법 제1조). 따라서 그 인상 폭은 가구 생계비 기준으로 정하는 것이 맞다. 최저임금 노동자가 가구 내 핵심 소득원인 경우가 많은 우리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최저임금위원회의 2019년 비혼 단신 노동자 실태생계비(218만원)나 한국노총의 2020년 표준생계비(단신 가구 230만원)와 비교해 2022년 최저임금으로 월급 226만원을 제시한 노동자들의 요구는 그런 점에서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세간에는 경제 상황이나 업종, 지역에 따라 인간다운 삶의 최저선도 다르다는 억지가 판친다. 우리도 비준한 국제노동기구(ILO) 제131호 협약 제2조에 따르면 최저임금은 삭감의 대상이 아닌데도 삭감이 거론된다.
국제노동기구의 세계임금보고서 최근호에 따르면 최저임금의 불평등 완화 효과는 여러 연구를 통해 대체로 합의된 사실에 속한다. 한국에서도 2018년과 2019년의 본격적인 최저임금 인상은 불평등을 줄였다.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 결과를 보면, 임금 격차는 2018년에 줄었다가 최저임금 인상률이 떨어진 2020년에 다시 벌어졌다. 중위임금을 채 못 받는 저임금노동자 비중도 같은 흐름이었다. 2018년 하위 40% 노동자의 월 임금 증가는 상당 부분 최저임금 인상 덕이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2018년 최저임금 인상이 중위 가계소득 절반 이하의 빈곤 가구를 줄였다는 보고도 있다. 코로나 경제위기로 심화된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서도 최저임금을 충분히 올리는 편이 타당하다고 볼 법한 대목이다.
우리 사회에서 저임금노동자들의 생계 기반이 사각지대로 내몰리는 현실은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그것은 최종 원청인 재벌과 공기업이 막대한 이익을 챙기면서 하청업자와 용역회사의 중간 착취를 방조해온 절망적인 경제구조에 기인한다. 여기 지옥열차가 달린다. 맨 꼬리칸에 저임금노동자들이 있다. 열차는 그들의 생존 수단인 최저임금을 바로 앞칸의 소상공인들이 부담하게끔 구조화되어 있다. 최저임금을 억눌러 잠시 숨통이 트인 소상공인의 이익도 결국 열차의 지배자들과 중간착취자들의 몫이 되고 만다.
촛불을 든 노동자들은 최저임금 인상이 이 병적인 현실을 뜯어고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다. 노동자와 소상공인을 절망시키는 그 구조의 개혁이 필요했다. 최저임금 인상분이 상생협력법 제22조의2에 따른 공급가격 조정에 자동 반영되게 하고 원청의 일률적 납품단가 인하 특약을 금지했어야 했다. 하도급법 적용 범위를 공정거래위원회 고시 업종 외에 전 업종으로 확대하고 전속고발권을 폐지했어야 했다. 우월적 지위의 온라인 플랫폼 기업이 소상공인에 부담을 전가하지 못하게 하는 입법이 필요했다. 유통재벌에 대한 골목상권 보호도 강화했어야 했다. 라이더유니온에서 제안한 안전배달료처럼 근로기준법 바깥의 특고 플랫폼 노동자들에게 최저임금 역할을 할 제도를 확충했어야 했다. 초기업 단체협약이 자리를 잡아갈 수 있도록 했어야 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이들 개혁 과제 대신에 산입범위 확대로 최저임금을 무력화하는 길을 택했다.
19대 대선 당시 최저임금 인상에 가장 소극적이던 자유한국당의 정책공약집 88쪽에는 2022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을 실현하겠다던 약속이 기록되어 있다. 이제 문재인 정부는 최소한 그 정도만큼이라도 이번에 최저임금을 올려야 옳다. 근본적인 구조 개혁의 과제를 내년에 출범할 새 정부가 이어받을 수 있게 하려면 그래야 한다. 오늘 노동자들의 최저임금 1만원 요구는 촛불의 마지막 남은 믿음이다. 그 믿음마저 저버리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