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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왜냐면

왜 택배 노동자를 마주하지 않는가

등록 2022-03-02 16:43수정 2022-03-03 02:31

전국택배노동조합 씨제이대한통운본부 조합원들이 지난달 21일 서울 중구 씨제이대한통운 본사 앞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전국택배노동조합 씨제이대한통운본부 조합원들이 지난달 21일 서울 중구 씨제이대한통운 본사 앞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왜냐면] 김동수 | 기록노동자·<유령들: 어느 대학 청소노동자 이야기> 저자

씨제이(CJ)대한통운은 왜 전국택배노동조합과 대화하지 않을까? 불문율처럼 여겨온 그간의 민법과 노동법상 판례들을 어길 수 없기 때문일 터다. 그 판례들은 이렇다. 원·하청 관계에서 하청노동자가 원청업체를 대상으로 어떤 요구도 할 수 없다. 그건 오로지 계약 당사자인 하청업체와 노동자 간에만 허용된다. 하지만 하청노동자들은 원청이 자신의 문제에 암묵적으로 개입한다는 사실을 합리적으로 의심한다. 원청이 내세우는 경쟁입찰제는 이 심증의 중요한 알레고리다. ‘최저’입찰제나 다름없는 이 제도는 원청의 의중이 하청에 반영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든다. 원청이 하청에 도급비를 얼마나 내려주느냐에 따라 일터의 환경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하청노조가 굳이 사법적 처벌까지 감수하며 원청에 찾아가는 건 이러한 맥락의 연장이다.

원래 노동법은 자본주의 사회에만 존재한다. 애초의 탄생 배경 자체가 자본주의를 유지하려는 목적이 강했다. 산업혁명 시기에는 자본가의 욕심에 따라 남녀노소 구분 없이 하루 종일 일을 시키고, 적게 주는 임금마저 체불하는 상황이 비일비재했다. 그 열악한 환경에서 기계처럼 일하는 노동자들은 정말 살기 위해 저항해야 했다. 그 결과 자본주의가 멈추는 최악의 변수를 없애기 위한 최소한의 타협안으로 바로 ‘공장법’이 나왔다.

대한민국 노동법도 자본주의적 법이란 방증이 있다. 사용자의 의견이 노동자의 요구에 비해 형식적으론 불리하게 개진되는 듯하지만, 실제론 유리하게 적용된다는 점일 것이다. 예외조항을 삽입하고 모호한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말이다. ‘중대재해처벌법’에서도 모호성은 발견된다. 요컨대, 원·하청 간의 ‘실질적’인 지배·운영·관리의 관계를 증명하면 하청업체에서 발생한 중대산업재해의 책임을 원청 사업주나 경영책임자에게 물을 수 있다는 부분이다. 어디까지가 실질적인 관계라고 볼 수 있을까? 자의적인 해석을 요한다.

외주화의 정점에 대기업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대재해처벌법은 외관상 대기업 총수를 겨눈 유일무이한 노동법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현재 관행처럼 벌어지는 원·하청 간의 도급·위탁·용역 계약으론 실질적인 관계를 인정받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동안의 합리적 의심들이 확인된다면 하청노동자의 문제까지 원청이 모두 끌어안아야 하는 초유의 상황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원청의 비용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게다가 내가 아는 한, 하청노동자 문제로 구속된 대기업 총수는 여태껏 없었다. 우리 사회는 총수 없는 대기업을 견디지 못한다. 단적으로 이재용 없는 삼성을 상상해보자. 경영능력보다 핏줄의 영향력이 더 우선인 재벌경영 체제에서 대체될 수 없는 총수의 부재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경제의 위기징후로 읽힌다. 이러한 신호들은 곧 관용적 수사와 판결의 정상참작사유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외주화가 일반화된 사회에서 노동법은 민법에 밀린다. 소시민들의 공간에서도 예외는 없다. 이를테면 최근까지 아파트 외곽 청소원으로 일했던 큰아버지가 재계약 3일 전에 해고통보를 받고도 부당해고를 주장할 수 없었던 건 그 방식이 ‘해고’(근로기준법)가 아니라 ‘용역업체에 대한 계약해지’(민법)였기 때문이다. 도급이나 외주화가 뜻하는 바를 잘 모르는 그는 ‘그만두셔야 될 것 같다’는 용역반장의 말 한마디에 너무나 당연하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고 터놓았다. 노동‘법’은 노동‘자’에게만 적용될 텐데, 정작 그가 그 법에서 배제됐고 그 상황마저 쉽게 인정해버린 것이다. 하청노동자라면 누구나 겪는 현실이다. 노동법의 태생적 한계 탓일까? 노동법이 사용자보다 노동자를 배신하는 일이 지극히 더 당연한 결말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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