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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왜냐면

‘여가부 폐지’라는 잘못된 길

등록 2022-03-21 16:25수정 2022-03-22 02:31

독일 양성평등 정책과의 비교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와 안철수 인수위원장,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등이 지난 18일 오전 서울 종로구 금융감독원 연수원에 마련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현판식을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와 안철수 인수위원장,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등이 지난 18일 오전 서울 종로구 금융감독원 연수원에 마련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현판식을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왜냐면] 문수현 | 한양대 사학과 교수

정부 부처가 시대의 변화를 반영해서 신설되고 폐지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역사적 소명”을 다했기에 사라져야 한다고 대통령 당선자가 언급한 바 있는 여성가족부 폐지 문제는 이런 일반적인 흐름과 결을 전혀 달리한다.

여가부가 “역사적 소명”을 다했는지 못했는지는 누가, 언제,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는가? 한국에서 살아가는 한 여성으로서 나는 여가부가 역사적 소명을 다한 나라에서 살고 있다고 전혀 느끼지 못한다. 백번 양보해서 성평등의 측면에서 그간 부분적으로 가시적인 성과가 있었다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 말은 난센스다. 누구도 우리나라가 이미 과학기술 강국이니 이제 과학기술정보통신부를 폐지할 시간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에서다. 성숙하지 못한 남성들의 ‘라커룸 톡’에나 어울릴 아이디어가 국가기구를 통해 제도화의 계기를 엿보는 작금의 상황은 소위 선진국들이 나아가는 방향과 정반대의 길이라는 점에서 더욱 우려스럽다.

한국의 좌우 세력에게서 호평받는 정치가인 앙겔라 메르켈이 재임하던 16년간 독일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양성평등으로 직진해 갔다. 이는 대통령 당선자의 표현에 따르면 “나눠먹기”인 할당제의 경우만 보더라도 분명하다. 집권 여당 기민련은 당직과 당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공직의 3분의 1 이상을 여성에게 할당하도록 한 1996년의 임시 조치를 항구적인 조치로 만들어냈다. 메르켈 행정부의 경우 4기에 걸친 내각에서 여성 장관 비율은 31~43.8%에 달했고, 2019년 메르켈 총리청의 국장급 고위직 8석 가운데 4석이 여성에게 할애되었다. 민간 기업의 할당제의 경우에도 2013년 유럽의회가 압도적 다수로 40% 할당을 가결한 바 있고, 독일에서도 2020년까지 30%를 이사회 구성원으로 임명하도록 결의하였다. 그런가 하면 일가정 양립 정책에 적극 나서서, 장기간 낮은 수당을 지불하여 여성들을 가정에 머무르도록 유도하던 기존 제도와 달리, 부모가 육아휴직을 하는 1년간 직전 임금의 67%까지 받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여성들의 경력을 인정하고 출산 후에도 여성들이 계속해서 직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이 과정이 수월했을 리 만무하다. 한 학자에 따르면 “한발 앞으로 내디디면 두발 뒷걸음쳐야 했던” 이 양성평등으로의 길에서 때로 총리인 메르켈이나 당시 ‘가족·시니어·여성·청소년부’ 장관이자 현재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우르줄라 폰데어레이엔의 정치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흥미로운 것은 현재 누구도 그 정치적인 ‘능력’을 부인할 수 없는 메르켈이나 폰데어레이엔 자신이 소위 “나눠먹기”인 할당제로 ‘능력’을 키울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두 가지 간단한 통계는 현재 독일 여성들의 상황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유럽에서 가장 출산율이 낮은 국가로 손꼽히던 독일이 1964년 이후 처음으로 베이비붐을 겪고 있다. 2019년 기준 독일 여성 1인당 출산율은 1.59로 0.81인 우리나라의 두 배에 가깝다. 그런가 하면 여성 고용률이 2006년 64%에서 2019년 73%로 수직 상승했다.

총리인 메르켈이 여성이었기 때문에 집권 여당이 양성평등에 적극적이었을 리는 만무하다. 양성평등 정책은 도시 여성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얻어내고자 하는 기민련의 중요한 집권 전략이었다. 이미 2009년 선거에서 사민당의 지지율은 남녀 간 격차 없이 23%대에 머물렀는데, 기민련의 경우 남성 유권자의 24.8%, 여성 유권자의 29.6% 지지를 얻을 정도로 남녀 간 지지율 격차가 생겼고, 2017년까지 이 격차는 점차 더 커졌다. 보수당인 기민련을 지지하지 않으나 메르켈을 지지하느라 혹은 메르켈의 여성정책을 지지하느라 기민련을 지지하게 되는 여성의 수가 점차 증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속가능성에 기반한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정상적인 정당이라면 어느 당이건 명심해야 할 통계이다.

군부독재가 끝나고 수십년이 흘렀고, 직선제로 선출한 대통령만 여덟번째다. 대통령직은 임기 5년의 계약직에 불과한 직책이라는 점에서 현 대통령 당선자도 예외는 아니며, 5년은 국가에 반드시 필요한 일을 잘 해내기에도 짧은 시간이다. 우리는 고작 5년 임기 대통령을 뽑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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