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5일 오후 서울 보신각 앞에서 열린 3.8 세계 여성의 날 기념 제37회 한국 여성대회에서 참석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왜냐면] 조고은 | 번역가, <열흘태엽> 발행인
20대 대통령 당선자의 주요 공약 중 하나였던 여성가족부 ‘폐지’를 비롯하여 여성인권을 후퇴시키려는 시도가 본격화되는 현재 한국의 상황에 잘 어울리는 단어가 바로 백래시(backlash)일 것이다. ‘반격’이란 의미의 백래시는 1960~70년대에 미국을 휩쓴 여성운동에 이어 1980년대에 몰아친 보수주의자의 반격을 정리한 수전 팔루디의 역작 <백래시>의 제목이기도 하다. 앞으로 5년간 한국에 무슨 일이 닥칠지 좀처럼 짐작할 수 없어 암담한 이 시기에 팔루디의 <백래시>가 다시 궁금해졌다. 1980년대 미국의 여성들은 백래시의 시기를 어떻게 지나왔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백래시’라는 개념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 했다.
백래시에 대한 첫번째 오해는 페미니즘 운동이 너무 과도한 나머지 기존 사회의 반발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백래시>에서 팔루디는 1980년대 미국의 여성혐오적 반격을 “완전히 평등을 달성했을 때가 아니라 그럴 가능성이 커졌을 때” 나타나는 보수적 반발인데, 특히 “그 반발이 정치·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백래시>에 등장하는 저명한 보수주의 정치가와 학자들은 입을 모아 여성들이 남성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가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또 하나같이 아무도 제대로 된 자료나 통계를 제시하지 않았다. 실제로 여성운동의 성과가 사회에 제대로 반영되지도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사회적·경제적 지위는 여전히 열악했음에도, 전쟁에 따른 미국의 경기호황이 가라앉고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가 도입되며 경제적 위기를 느낀 남성들은 아무 근거가 없어도 그 원인을 기꺼이 여성에게 돌렸다. 보수주의자들은 마치 자신들이 과격한 여성운동의 부작용으로 피해를 입고 반발하게 된 무고한 시민인 듯한 언어를 구사하지만, 그들은 처음부터 여성을 착취했고 앞으로도 그 억압과 착취를 지속하기 위해 조금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본인의 극우 사상을 밀고 나가는 세력이었다.
백래시에 대한 두번째 오해는 이런 식의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은 언제나 있어왔고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므로 굳이 ‘지금의 백래시’ 상황에 주목할 필요도 없다는 일종의 회의주의이다. 심각한 소득격차 속에서도 대안적인 삶을 찾아보려는 여성들에게 출산기피 부담금을 부과하겠다는 둥 강압적 규제로 단속하려 하는 정부를 코앞에 둔 지금도 비슷한 생각이 자꾸 떠오른다. 하지만 <백래시>에서 수전 팔루디는 19세기부터 미국 여성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그것이 온전한 진실이 아님을 폭로한다. 실제로 왕성한 여성운동 후에는 드센 반격이 들이닥치지만, 여성들은 계속해서 노동시장에 진출하여 경제권을 확보해 나갔고, 자신의 재생산권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복귀한 남성들을 위해 집안으로 돌려보내졌다던 1960년대 여성들이나 레이건 정부의 백래시에 시달리던 80년대 여성들마저도 교육받고, 취직하고, 페미니즘을 위해 투표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억압은 저항을 만들어내는 만큼이나 저항으로 억압이 강해지기도 하기에 ‘억압이 말끔히 사라지고 완전한 해방이 찾아오는 순간’이 도래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것이 아무리 저항해도 권력관계는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뜻은 아니다. 계속해서 저항과 억압의 양상은 변화하고, 그 와중에 결정적인 전진과 후퇴가 나타난다. 모든 것이 뒤로 돌아가는 듯한 지금의 상황에서도 차별금지법을 만들고 돌봄 지원 확대를 요구하며 계속 사회의 변화를 만들어갈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행보를 보며 답답한 마음에 다시 읽은 수전 팔루디의 <백래시>는 의외로, 속 터지는 궤변의 보수주의자보다 그 와중에도 자유를 향해 걸어나갔던 여성들의 이야기였다. 미국의 80년대에서 그 여성들을 빼놓고 오직 백래시 세력만 넘쳐났던 양 기억하는 것은 보수주의의 반쪽짜리 관점일 뿐이다. 우리에게도 지금 당장 파리바게뜨 노조에서, 혜화역 지하철에서, 동성 혼인신고서를 수리하지 않는 구청에서 싸우고 있는 여성들이 있다. 새 정부가 어떤 뒷걸음질을 치든 앞으로 다가올 5년의 주인공은 주저앉지 않고 차별에 맞서 싸우는 여성들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