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왜냐면

왜곡된 집단주의 사회에서 개인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

등록 2022-04-27 16:49수정 2022-04-28 02:40

[왜냐면] 정지우 ㅣ 문화평론가·변호사

얼마 전 대법원이 동성 군인 간 성관계가 합의로 이뤄졌고, 특별히 군기를 직접 해친 사실이 없다면 처벌할 수 없다는 전향적인 판결을 내놓았다. 이전까지는 군인이기만 하면 동성 간 합의로 사적 공간에서 성관계했더라도 처벌해왔다. 그런데 대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군형법 조항과 관련해, ‘군대라는 집단의 군기’뿐만 아니라 ‘군인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 이유 중 하나로 2013년 이미 관련 법이 개정된 사실을 들었다. 이전까지 남성 간 성행위를 의미하던 ‘계간’이라는 용어를 법에서 삭제했으므로, 해당 조항은 더는 동성 군인 간 성행위 자체를 금지하는 규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동성 군인 간의 성관계 자체가 사회적으로 혐오감을 일으키는 추행이라 볼 수 없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이번 판결에서는 대법원이 적극적인 헌법 해석을 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만약, 지금의 군형법 규정이 동성 간 성관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처벌하게 만든 규정이라면 위헌일 소지가 다분하다고 본 것이다. 아무리 군대 내 집단 군기가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 평등권, 행복추구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가령 훈련이나 전시, 작전, 근무 중도 아닌 개인적인 시·공간에서의 자유만큼은 헌법이나 전체 법질서 관점에서 반드시 인정되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이번 판결을 두고 동성애를 옹호하는 판결이라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소수자 보호 못지않게 ‘집단에 대한 개인의 옹호’를 적극적으로 강조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우리 사회는 집단의 우위와 개인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집단적 목표나 규율, 서열을 위해 개인의 인권이나 삶이 심각하게 제한되는 경우가 많았다.

상명하복의 군대 문화, 획일적인 답이 정해진 정답 문화, 엄격한 위계질서에 바탕한 수직적이고 폭력적인 조직 문화, 서열 안에서 인격이 무시되는 갑질 문화 등이 우리 사회가 갖고 있던 그간의 오명들이었다. 이를 한마디로 ‘왜곡된 집단주의 사회’라고 부를 수 있다. 개인 간 조화보다는 집단 자체의 폭력성이 극대화된 사회인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는 각자도생 문화라든지, 이웃 공동체의 해체, 외로움과 단절이 심화돼가는 현상은 모두 이와 같은 ‘집단주의 문화’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학교, 군대, 회사 등에서 엄격한 서열과 집단중심적인 문화를 경험한 사람들의 ‘차라리 외로운 게 낫다’는 선택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그늘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우리를 둘러싼 집단들이 개개인을 보호하고 존중하는 사회였다면, 이토록 극단적인 반작용이 일어나진 않았을 것이다. 개인을 억압하는 집단주의는 온전한 개인도, 온전한 집단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사람이 서열이나 수직적인 조직의 일부가 아니라, 개개인으로 존중받으며 바로 서는 사회에서는 개인과 집단도 조화를 이루어나간다. 그런 문화 속에서는 집단이 개인을 억압하기보다는 개인의 삶을 든든하게 뒷받침해주는 밑바탕이자 무대가 될 것이다. 개인 또한 집단으로부터의 탈출만 꿈꾸는 게 아니라 집단을 살리고 창조해가는 건강한 구성원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열과 관계없이 유연하게 소통하고, 다양한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존중하며, 권력관계와 상관없이 서로를 인격체로 대하는 문화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집단이 개인을 완전히 억압할 수 없다는 이번 대법원 판례의 취지 또한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집단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도 먼저 개인이 존중받아야 한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