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16일(현지시각) 저녁 폴란드 바르샤바 서부 버스터미널 들머리에 마련된 천막에서 기부받은 옷 중 입을 옷을 고르러 간 엄마를 한 어린이가 인형을 가지고 놀며 기다리고 있다. 바르샤바/김혜윤 기자
[왜냐면] 조명환 |한국월드비전 회장
지난달 14일 오전 10시, 나는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국경지대에 서 있었다. 하늘은 파란색으로 색칠한 캔버스 같았고, 광활한 들판 위 저 멀리 옹기종기 모여 있는 나무들의 모습은 그림에서나 볼 듯한 평화로운 시골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러나 눈앞에는 짐가방을 끌며 우크라이나에서 넘어오는 피란민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주변의 평화롭고 아름다운 배경과 달리,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감, 피로 그리고 절망이 가득했다.
딸과 함께 지친 모습으로 짐 가방을 힘겹게 끌고 오는 한 여성과 얘기를 나눴다. 그녀 어머니는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고, 신장 투석을 받는 환자인 남편은 더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없게 돼 건강이 악화한 상태에서 딸과 아내가 피란길에 오르는 것을 배웅했다고 했다. 가족들을 모두 보내고 홀로 집에 남은 남편은 반려견과 함께 이 모든 상황이 끝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투병 중인 남편을 놔두고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말하는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어떤 말로도 그녀와 딸을 위로할 자신이 없었다. 그 참담한 심정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대신 잠시라도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반려견 사진을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반려견과 함께 즐거웠던 가족들 동영상을 보여주었고, 순간 그녀와 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다행히도 동영상 속 가족이 함께 행복했던 시간을 이야기하며 마음의 평온을 찾는 듯했다.
나는 전쟁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한국전쟁으로 영문도 모른 채 어린 나이에 피란길에 올랐던 내 부모님의 심정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70년 전이 아닌, 지금 이 순간에도 두려움과 슬픔 속에 피란길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국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월드비전이 지원하는 한 난민센터에서 만난 이사벨라도 엄마와 함께 국경을 넘어왔다. 일곱살 어린아이 이사벨라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고 있었다. 케이(K)팝 걸그룹 ‘블랙핑크’ 때문이었다. 블랙핑크 동영상을 보여주자 이사벨라는 어깨를 들썩이며 가사를 따라 부르며 즐거워했고,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엄마도 환하게 웃었다. 음악이 국경과 인종을 뛰어넘어 평안을 주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 순간이었다. 이사벨라는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사과주스를 블랙핑크에게 전해달라고 내게 건넸고, 나는 꼭 전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마지막으로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자, 이사벨라는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라고 답했다.
지난 2월, 전쟁이 시작된 뒤 우크라이나 어린이 750만명 가운데 3분의 2 이상이 이사벨라처럼 집을 떠나야만 했다. 난민의 90%가 여성·아동·청소년이며 이 가운데 40%는 14세 미만으로 추정된다.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과 헤어지고,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평범한 일상을 빼앗겨야만 했다. 이 분쟁이 얼마나 오래 걸릴지, 언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 끔찍하고 비극적인 분쟁이 아동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많은 사례를 통해 잘 알고 있다. 분쟁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 계속해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은 생필품을 전달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리라.
이사벨라가 전해준 사과주스를 소중하게 들고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이사벨라도 어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블랙핑크의 노래를 부르며 친구들과 뛰어노는 그 일상을 되찾길 소망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약속했다. 이사벨라를 비롯한 모든 어린이가 평범한 일상으로 회복하는 그날까지 반드시 함께할 것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