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이병권 | 전 한국메세나협회 사무처장
<소프트파워>라는 책을 쓴 저명한 국제관계학자인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명예교수는 지난해 10월 미국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콘퍼런스 온라인 기조연설에서 “한국은 아직 자신이 가진 소프트파워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지만, 조만간 한국의 문화가 가진 소프트파워는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소프트파워로 인정받을 것”이라고 평가한 바 있습니다. 특히 중국 소프트파워 중흥의 실패에 대비해 한국 소프트파워의 융성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실제 한국은 케이팝을 비롯해 드라마, 영화, 음식, 소설 등 영역에서 세계의 주목을 받는 나라가 됐습니다.
<더 타임스>, <뉴욕 타임스>, <르몽드> 등 세계 유수 언론들이 한국의 문화적 성과를 분석하고 진단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한국 안에서는 그저 얼떨떨하고 우쭐한 기분만을 즐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계인들이 한국 문화의 성취에 찬사를 보내지만, 정작 우리는 우리 것의 보전과 발전에 얼마나 노력해왔을까요. 문화산업의 뿌리인 기초예술 발전을 위해 어떤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왔는지, 시민들이 손쉽게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인프라는 얼마나 갖추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정부와 지자체 산하의 그 많은 공연장이 얼마나 양질의 공연을 지속해서 제공하고 그 성과가 합리적으로 평가되고 있을까요.
코로나 시대 최대 수혜주라는 넷플릭스를 비롯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들을 생각해봅니다. 이들은 고객에게 매우 친절합니다. 자신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가입자가 주변 여럿과 공유할 기회를 주고, 무엇보다 선호하는 콘텐츠 장르와 종류에 따라 맞춤형 콘텐츠를 제공하고 추천합니다. 고객이 어떤 장르를 선호하는지, 체류시간은 얼마나 되는지 등을 끊임없이 분석하고 심화해나갑니다. 지역(국가)별 특성에도 주목하고, 이런 속에서 고객들의 필요에 맞춰 서비스를 발전시킵니다.
그런데 우리네 공연장이나 문화시설들은 어떤가요. 여전히 찾아오는 손님 맞기에 안주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손님이 적으면 문화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 부족을 탓할 뿐입니다. 동네마다 즐비한 편의점도 소비자 필요에 따라 수시로 상품군을 바꾸며 손님 발길을 잡아끄는 시대인데 말입니다.
기업에서는 상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고객들의 만족, 불만족, 문의사항, 요구사항 등을 이른바 ‘시아르엠’(CRM: 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고객관계관리)을 통해 분석하고 대응합니다. 콘텐츠업계 쪽에서도 이 기법을 이용해 각종 콘텐츠를 데이터로 분석하고 이를 심화시켜 또 다른 상품이나 서비스를 개발하고 신사업 추진에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 핵심은 고객 데이터입니다. 이 데이터를 쌓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하고 관리에 심혈을 기울입니다.
우리 공연장에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바로 시아르엠과 고객 데이터입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공연시설인 예술의전당만 해도 자체 고객 데이터가 55만을 넘지만, 그저 컴퓨터 안에서 잠자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이 어떤 공연을 보았는지, 어떤 장르를 좋아하는지, 얼마나 자주 오는지, 재방문을 유도할 마케팅 기법과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 고민이 보이지 않습니다. 당연히 고객을 기반으로 한 정책이나 비전 수립 또한 난망합니다.
정부와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각종 공연장에 이 기법을 적용하면 어떤 변화가 생길까요.
첫째, 예산 투입 효과를 검증하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문화예술 발전에 정부와 지자체의 역할은 절대적입니다. 가까운 일본에서 정부와 지자체의 문화예술계 지원분이 전체의 20~30%라면, 한국은 70~80% 수준입니다. 일본의 경우 그만큼 민간부문 지원과 티켓파워(민간 판매)가 크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 시기 일본을 비롯해 미국, 유럽 쪽 문화예술계는 한국보다 훨씬 심각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문제는, 한국 정부나 지자체는 해마다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지만 정작 전국의 그 많은 공연장과 예술기관들이 지원금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쓰는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누가 왜 얼마나 자주 공연장을 찾는지 데이터 분석에도 손을 놓고 있습니다. 시아르엠이 전국 예술기관과 공연장에 깔리고, 이를 기반으로 고객관리를 한다면 정부와 지자체 지원금의 효율적인 관리와 평가가 가능해집니다.
둘째, 관객(고객) 활성화를 가능하게 합니다. 각 공연장은 고객 데이터를 분석해 더 적합한 공연 형태와 장르, 연주자를 고민할 수 있습니다. 또 다양한 데이터 기반 안내를 통해 관객의 재방문과 관심을 유도할 수 있습니다. 본격적인 마케팅이 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에 4차 산업혁명의 꽃이라는 인공지능(AI)의 딥러닝을 통해 수많은 연관관계와 문화적 연결고리를 분석하면, 해당 공연기관을 넘어 새로운 예술 콘텐츠로 발전할 경로를 모색할 수도 있습니다. 중앙정부의 경우엔 전국적인 시아르엠 네트워크 분석을 통해 국가적 문화자원의 효율적인 집행과 투자지역, 신규개발 등에 활용할 수 있습니다.
나이 교수는 ‘소프트파워는 상대방을 나의 매력으로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경제나 군사력과 같이 하드파워는 일시적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마음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반면 문화와 예술 같은 소프트파워는 바로 상대방의 마음을 얻습니다.
지속가능한 소프트파워를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우리도 이제 문화예술에 정보기술(IT) 기반의 시아르엠을 접목해야 합니다. 내가 즐기지 않는 것을 남에게 추천하기 어렵습니다. 시아르엠을 통해 더 많은 시민이 우리 문화를 이해하고 사랑할수록 우리의 소프트파워는 무럭무럭 성장하고 글로벌화할 것이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