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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왜냐면

우리가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을 포기한 이유

등록 2022-07-13 18:09수정 2022-07-14 02:37

음식물 쓰레기 퇴비로 만든 화단에서 튤립을 피운 분해정원. 가운데 파란 통은 가정에서 삭힌 퇴비를 다시 한번 완숙시키기 위한 퇴비 통이다. 이아롬 제공
음식물 쓰레기 퇴비로 만든 화단에서 튤립을 피운 분해정원. 가운데 파란 통은 가정에서 삭힌 퇴비를 다시 한번 완숙시키기 위한 퇴비 통이다. 이아롬 제공

[왜냐면] 이아롬 | 인천 계양구 ‘분해정원’ 대표

구청 주무관에게 전화해 “마을공동체 만들기 지원사업을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동네에서 공동체를 꾸려나가다 보면 약간의 지원금도 아쉬울 때가 많기 때문이다. 2년째 함께 공동체를 꾸려온 구성원들에게도 미안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지원 포기는 불가피했다.

내가 인천시 계양구 귤현동에서 운영하는 ‘분해정원’은 가정에서 쉽게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를 탄소 배출 없이 흙으로 되돌려 보내기 위해 지난해부터 시작한 동네 모임이다. 가정에서 음식물 쓰레기를 한달 이상 발효시킨 다음, 공원에 조성한 정원 한가운데 퇴비 통에서 추가로 숙성한다. 이렇게 몇달을 거치면 제법 훌륭한 거름이 되는데, 우리는 이걸로 공원 정원의 꽃을 키운다.

냄새가 심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구경만 하던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 참여하면서 네 가구가 모여 시작한 모임은 어느새 열다섯 가구로 늘었다. 계양구가 아닌 다른 구에서도 참여자가 생기고, 퇴비량이 많아지니 분해정원이 더 필요해졌다. 공원에 세번째 정원을 만들고, 더 많은 주민이 접근할 수 있도록 정원에서 식물 이름표를 만들거나 정원을 그리는 교육을 하겠다는 계획서를 제출해 지난 6월 계양구청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에 선정됐다. 강사비, 재료비, 다과비 등으로 200만원을 지원받을 수 있게 됐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다음부터 벌어졌다. 분명 사업계획서에서 밝혔고 구청 심사도 거쳤는데, 구청 공원녹지과에서 “추가적인 공원 훼손을 허용할 수 없다”며 분해정원 추가 조성을 불허한 것이다. 공원녹지과 주무관은 “시민들이 자신의 먹거리를 키우기 위해 가끔 공원을 훼손하는 경우가 있는데, 공원을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시민 활동 역시 공원을 훼손하는 일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이미 선정된 기획안을 수정하기 위해 다시 구성원들과 머리를 맞댔다. 이번에는 공동체 결속에 초점을 두고 지원예산 용처를 재편성했다. 한 해 넘게 공동체 활동을 이어가면서 일 배분 등과 관련해 충돌하는 일 등이 잦아져 심리상담사와 함께 우리 활동과 마음을 돌아보는 워크숍을 하면 좋겠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구청은 “사이비종교처럼 느껴진다”며 불허를 통보했다. “이전에 종교단체에서 비슷한 활동으로 문제가 됐다”며 “다과비와 정원 보수로 예산을 다시 수정하라”는 안내가 뒤따랐다. 하지만 정원 보수는 불필요했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체험을 시켜주고, 주민들에게 꽃을 나눠주는 단순 봉사활동만 남을 뿐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원 가꾸기(가드닝)가 주를 이루는 만큼, 꽃을 비롯한 재료가 시즌마다 변동이 크고 가격이 천차만별이라 예산서에서 개별항목의 가격을 자세히 적기는 어렵다고 여러 차례 설명했지만, 구청은 줄곧 예산 내역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기재하라고 요구했다. 공무원들로서는 문제 소지를 남기고 싶지 않았으리라. 회계를 꼼꼼하게 처리해야 한다며 회계 교육에 참여하라고 불과 며칠 전 통보하더니, 정작 시민들을 불러놓고는 초반 한 시간을 구청장 참여 행사 예행연습으로 허비했다.

공무원이 직접 주민모임을 찾아 모니터링하면 끝날 일을 서면으로 요구하니, 현장 활동가들은 그야말로 ‘서류 지옥’에 빠진다. 똑같은 계획서를 양식만 바꾼 채 다시 써 내고, 구청 공무원을 위한 보고서까지 제출해야 한다. 관련 기록은 꼭 필요하지만, 타이트한 양식에 맞춰 써야 하는 보고서는 사람을 지치게 한다. ‘200만원 지원금을 받기 위해서는 200만원 이상 공짜 노동을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지원사업 중간 지원 활동가인 컨설턴트나 지원자들을 심사하는 심사위원들은 주민들이 들고 오는 사업 계획이 너무나 천편일률적이고, 공동체를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며 한탄한다. 하지만 주민이 주도적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하면 공무원들이 발목을 잡는다. 상황이 이러니, 매년 해온 똑같은 아이템만이 올해도 내년에도 마을공동체 지원사업 목록에 오른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지방자치 30년 동안 ‘민관 협력’이나 ‘주민 참여’ 같은 구호들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여전히 주민은 ‘참여’가 아닌 ‘동원’의 대상일 뿐이었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확실한 건 구청이 현장은 외면한 채 문서만으로 소통하고 일 처리를 한다면 나아지는 것은 없다는 점이다. 새로운 시민 활동을 기대한다면, 새로운 지원 시스템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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