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토학살 100주기 추도사업 추진위원회’가 지난 12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발족식을 하고 있다. 추진위에는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등 40여 개 시민단체가 참여했다. 연합뉴스
[왜냐면] 박덕진ㅣ ‘시민모임 독립’ 대표
9월1일은 간토대진재 조선인 희생 99주기가 되는 날이다. 내년이면 100주기다. 그러나 이 역사적 비극에 대한 대한민국의 기억은 민망한 수준이다.
1923년 9월1일, 일본 간토 지역에 대지진이 발생했다. 큰 화재가 났고 막대한 인명피해가 있었다. 하지만 더욱 참혹한 재앙은 자연재해 이후 조선인 학살이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이 일본인을 공격하고 부녀자를 겁탈하고 있다” 등의 가짜뉴스가 퍼졌다. 바로 일본 군대, 경찰, 민간 자경단이 조선인에 대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은 조선인 희생자를 6661명으로 추산했다.
당시 도쿄 와이엠시에이 총무로 이재동포위문반을 조직해 희생자 확인에 나섰던 최승만 선생은 <나의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다. “내가 도쿄에 있을 때 매년 9월1일이 되면 잊지 않고 추도식을 유학생과 더불어 했다. 1934년 귀국해서 보니 9월1일이 되어도 신문이나 어떤 단체도 이 학살사건을 말하는 데가 없었다. 1982년, 그러니까 59년 만에야 비로소 추도회도 하고 신문에서 떠들기 시작하였다. 무관심이라고 할까. 알지 못해서 그랬을까. 이런 큰 사건을 모르고 지냈다면 이보다 더 큰 과오가 어디 있을까….”
근간 일련의 변화가 있었다. 애플티브이플러스(TV+)가 만들어 세계의 주목을 받은 드라마 <파친코>가 이 세계사적 학살사건을 조명했다. 한국 시민사회단체들이 연대한 ‘간토학살 100주기 추도사업 추진위원회’가 발족했다. 추진위는 진상규명특별법 제정 운동을 전개할 예정이다. 일본 시민단체들도 100주기 추도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아베 신조 전 총리 사후, 일본 자민당은 참의원 선거에서 압승했다. 평화헌법 개정과 ‘전쟁할 수 있는 일본’의 등장은 예정된 수순이다. 반면에 윤석열 대통령은 아베 전 총리 분향소를 찾아가 “아시아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헌신하신…”이라고 조문록에 적었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강제징용 배상 문제 해결을 일본에 공언했다. 일본에 대한 저자세 외교가 윤 정부 기조다.
한-일 청구권협정 주역인 김종필 전 총리는 협정 체결 50년이 된 2015년, “일본은 우리나라를 낮추어 본다. 그런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라고 토로했다. 재일 역사학자 강덕상 선생은 간토 학살의 뿌리를 1894년 동학농민군 학살에서 찾았다. 간토 학살은 돌출 사건이 아니었다. 일본인에게 동학농민군 학살의 경험과 기억은 의병 진압을 거쳐 1919년 3·1운동 진압, 1920년 경신 학살로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대지진 후 간토 거주 조선인 무차별 학살이라는 광란이 벌어진 것이다. 폭력으로 내면화된 조선인 혐오는 현재도 일본 내 조선학교 차별정책으로 이어지고 있다.
일제강점 피해자로서, 우리는 가해자 일본의 엄중한 역사 성찰을 요구한다. 과거 반성은 선린 호혜의 한-일 관계 구축의 기본 전제여서다. 그런 면에서 과거 전쟁범죄를 부정하며 우경화로 치닫는 일본의 모습은 심히 유감스럽다. 혐오가 폭력을 낳고, 폭력이 다시 혐오를 내면화하는, 악순환 굴레로 스스로를 강박하고 있다. 윤 정부의 대일 외교도 실망스럽다. 저자세 외교는 일본 내 극우세력의 입지만 강화할 뿐이다. 아시아 평화를 위협하며, 일본의 자기 파멸적 우경화를 부추길 뿐이다. 윤 정부의 대일 외교정책 전환을 촉구한다.
내년은 간토 학살 100주기다. 시민모임 독립은 지난해에 이어 ‘기억’을 위한 활동을 전개한다. 99년 전 일본의 조선인 무차별 학살을 확인하고, 다시는 이런 야만 행위가 일어나지 않도록 일본과 한국이 함께 기억하자는 것이다.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한 맺힌 죽음들을 추도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이 역사 기억이 아시아 평화의 초석을 놓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시민모임 독립이 다음달 일본 대사관 앞 1인시위를 다시 시작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