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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왜냐면

‘노동시장 개혁’에 나서겠다는 윤석열 정부의 ‘하르츠 개혁’ 오남용을 경계한다

등록 2022-09-07 18:39수정 2022-09-08 02:06

지난달 17일 오전 영업을 준비하고 있는 서울시 동작구의 한 음식점 TV에서 윤석열 대통령 취임 100일 기자회견 방송이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17일 오전 영업을 준비하고 있는 서울시 동작구의 한 음식점 TV에서 윤석열 대통령 취임 100일 기자회견 방송이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왜냐면] 임영섭 | 재단법인 피플 미래일터연구원장·전 주독일 노무관

“독일에서 사민당이 노동개혁(하르츠 개혁)을 하다 정권을 17년 놓쳤다고 한다. 그러나 독일 경제와 역사에 매우 의미 있는 개혁을 완수했다. 노동도 현실의 수요에 맞춰 유연하게 공급돼야 하는 측면이 있다.” “지금 노동법 체계가 과거 2차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제 4차 산업혁명, 새로운 산업구조에 적용될 노동법 체계로 바꿔야 한다.”

지난달 17일 윤석열 대통령 취임 100일 기념 기자회견에서 나온 말들이다. 앞서 6월23일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도 ‘노동시장 개혁 추진방향’ 브리핑에서 “노동시장의 핵심 요소이자, 국민 대다수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근로시간과 임금체계를 개선하는 것은 해묵은 숙제이자 현재진행형 과제”라고 언급했다.

종합하면, 정부는 주52시간제 등 근로시간 제도 보완과 직무급 등 성과중심 임금체계로 전환하는 노동시장 개혁을 추진할 계획이고, 독일의 하르츠 개혁을 그 모델로 삼겠다는 뜻을 밝힌 셈이다.

하르츠 개혁은 어느새 노동시장 개혁의 대명사처럼 사용되고 있다. “하르츠 개혁으로 ‘유럽의 병자’로 불리던 독일이 다시 부흥하게 되었고, 그 핵심은 노동시장의 유연화로 인한 고용의 확대”라는 주장도 널리 퍼져 있다. 과연 그런 것인지 살펴보자.

2000년대 초반 독일은 내수회복 지연, 고정투자 감소, 수출 정체 등으로 인해 경제불황이 지속되면서 실업률이 두자릿수에 이르렀다. 연방정부는 2002년 치솟는 실업을 낮추기 위해 폴크스바겐 이사 출신인 페터 하르츠를 위원장으로 하는 ‘노동시장에서의 현대적인 서비스 위원회’를 설치해 노동시장 개혁방안을 마련하도록 했다. 이 개혁안은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 사회복지제도 개혁, 경제활성화, 교육·훈련 혁신 등을 내용으로 하는 슈뢰더 내각의 경제개혁 프로그램인 ‘어젠다 2010’에 반영됐다.

이 가운데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0인 이하 근로자를 고용하고 있는 소기업·수공업기업에는 부당해고법 적용을 완화해 신규 채용을 쉽게 하고, 신규 창업자는 창업 후 4년까지 고용계약 기간을 신축적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해 단기계약근로자 채용을 보장한다.

―최장 32개월까지 지급하던 실업급여를 55살 미만은 12개월까지, 55살 이상은 18개월까지로 단축해 실업자의 경제활동 참여를 유도하고, 실업급여와 사회보장 혜택을 통합하면서 취업 알선을 거부하면 급여 지급을 중단하여 취업을 유도한다. 또 1인 창업 및 월 400유로 이하 저임금·단시간 일자리인 ‘미니잡’ 활성화를 위한 세제 혜택 등 각종 지원을 통해 실업급여 수급자들의 취업을 촉진한다.

―연방고용청을 민간운영 체제로 개편하고 하부조직인 고용사무소와 사회복지사무소를 잡센터로 통합해 구직자 상담 및 취업 알선, 급여 지급 등 모든 서비스를 통합 제공한다.

종합하면, 실업자들이 실업급여나 사회부조에 의지하기보다 노동시장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한 대책이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상적인 고용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근로자들의 ‘근로시간과 임금체계 개선’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노동시장의 현대화된 서비스―실업 감소와 연방고용청 개편을 위한 위원회의 제안’이라는 위원회 보고서 제목에도 잘 나타나 있다. 또 2015년 세계경제연구원 초청 강연에서 하르츠 본인이 “모든 사람이 실업수당보다는 노동이 중요함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전 정부도 노동시장 개혁을 위해서 필요하면 하르츠 개혁을 끌어왔다. 2015년 박근혜 정부는 ‘고용률 70%’ 공약을 내세우면서 모범사례로 하르츠 개혁을 들었고, 문재인 전 대통령도 2018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출범식에서 노사정 대타협 사례로 이를 언급했다. 그런데 같은 사안을 두고서 각각의 필요성에 따라 다른 측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박근혜 정부는 고용 확대, 문재인 정부는 사회적 타협, 그리고 윤석열 정부는 근로시간과 임금체계 개선의 관점에서.

정책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 다른 나라의 사례를 참고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고 우리가 처한 현실을 고려하는 것이 전제돼야 한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는 무지로 치부될 수 있지만, 알려는 노력이 부족하거나 알면서도 일부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책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방편으로 끌어다 쓰는 것은 국민을 오도하는 일이고 해악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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