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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왜냐면

이 가을날, 누군가의 날개가 돼주지 않으실래요?

등록 2022-10-17 18:52수정 2022-10-18 02:36

일러스트레이션 김예원
일러스트레이션 김예원

[왜냐면] 조연승 | 62살·부산광역시 북구

편지를 씁니다. 당신께요.

아무런 빽도 줄도 없는 아주 하잘것없는 제가 이렇게나 많이 행복해도 되는 건지, 머언 가을 하늘 쳐다보며 혼자 미소 짓습니다. 하루하루 행복해하는 저를 세상에서 누가 알긴 할까요? 제가 힘들어할 때 알아주는 이가 없었듯이, 이처럼 행복에 겨워 미소 짓고 있어도 아는 이는 없겠지요. 세상을 알면 알수록 나만 혼자인 게 아니라 다들 혼자임을 깨달았습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은 괜찮으신가요? 이 글을 읽고 계실 당신도 꼭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으로, 부족하고 서툴지만 글을 써 내려갑니다.

사연인즉슨 약 19년 전인 2004년 5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힘들게 살 때 얘기입니다. 당시 44살이던 저는 경남 밀양시 ㈜한국화이바 생산직으로 근무하면서 고3 딸, 중2 아들과 함께 임대아파트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3교대였던 공장이 계속된 인원 감축으로 고용이 불안해져 고민 끝에 직업을 바꿀 궁리를 하게 됐습니다. 당장 세 식구 끼니 해결도 어려운데 다른 생각을 한다니 사치 같았지만, 하루하루 불안의 연속이어서 그냥 지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주택관리사 자격시험을 떠올렸고, 아이들에게 얘기했습니다. 아들도 딸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엄마는 꼭 하실 수 있을 거예요”라고 말해 어찌나 놀랐던지요.

결심을 굳히고 주민센터를 찾아갔지만 거절당하고 돌아옵니다. 다시 고민하다 밀양시청에 찾아가서 담당자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했지만 역시 그냥 되돌아와야 했습니다. 멀쩡하고 건강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병원에 입원하거나 진단서를 제출하면 고려해볼 수는 있다고 하더군요.

당시 말씀드렸던 자초지종이란, ‘두 자녀를 키우기에는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공장에서 일하는 게 너무 미래가 불안하니 직업을 바꿔보려 한다. 주택관리사 공부를 하고 싶으니 시험을 볼 때까지 6~7개월 동안 세 식구 끼니를 위해 정부에서 빚이라도 좋으니 도움을 주셨으면 좋겠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며칠을 더 고민했지만 아이들 미래를 생각하면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나이가 많아지면 더 어려워질 테니 말이죠. 무작정 경남도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조직도를 찾아, 여성 무슨 담당이던 분께 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분이 바로 지금 저와 제 가족 삶에 평온과 행복의 꽃길을 깔아주신 강경남님입니다.

다음날 바로 전화가 왔습니다. 목소리가 참 따뜻하더군요. ‘생각 잘하셨으니 열심히 공부해서 꼭 합격하시라. 힘닿는 데까지 도와드리겠다’는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어려울 때 꼭 연락을 주면 힘이 돼드리겠다’는 말씀과 함께. 주민센터와 시청에서 받은 마음의 상처는 대신 사과드린다고도 하셨는데, 전화를 끊자 이내 주민센터와 밀양시청 담당자한테서 ‘정말 미안하다’는 사과 전화가 왔습니다.

이튿날 강경남님은 저와 제 가족이 살던 임대아파트를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기억으로 30대 후반쯤으로 보였던 강경남님은 ‘한달 비용 얼마쯤이면 세 식구가 살아갈 수 있겠냐’ 등등 몇가지를 물으셨고, 파격적인 지원을 약속해주셨습니다.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대박’이란 생각만 떠올랐습니다. ‘저를 뭘 믿고 이렇게 도와주실까?’ 싶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시작했고, 바쁜 엄마를 대신해 고3 딸아이가 집안일을 도맡았습니다. 중2 아들이 털어준 빨래를 키 큰 누나가 받아 빨랫줄에 널고, 둘이 나란히 앉아 빨래한 옷을 개켜서 서랍에 차곡차곡 넣던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그런 응원 덕에 저는 그해 11월 주택관리사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아이들이 기뻐하는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우리 세 식구는 그때부터는 꽃길만 걸어온 것 같습니다.

한 공무원의 생각이, 판단이 저 같은 하잘것없는 사람에게 꿈과 희망을 가지고 도전해볼 기회를 줬습니다. 한 사람 인생을, 그의 가정을 송두리째 바꾸는 마력을 보였습니다. 그 뒤로 국민으로서 조국에 대한 소속감 등 이런저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마움이 교차했습니다. 아이들도 이런 제 마음을 읽었는지 모두 공무원이 됐습니다. 딸은 부산시 7급 공무원으로, 아들은 중앙부처 7급 공무원이 돼 잘 살고 있습니다.

‘오늘은 늦습니다.’

가족 단톡방에 아들이 올린 메시지 때문에 저녁 이 시간이 더 평온하고 여유롭습니다. 딸내미가 퇴근길에 저녁식사 대용으로 떡볶이를 사 온다기에 기다리는 중입니다. 평소에도 밥상에 반찬 한가지만 있어도 반찬 투정은 없습니다. 아이들 어릴 때 직장생활을 하느라, 다른 집 엄마처럼 등굣길 가방을 챙겨주거나 갑자기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학교를 찾아 아이들을 기다려주지도 못했습니다. 아이들한테 미안한 마음에, 어릴 적 사진도 제대로 못 봅니다. 그랬던 아이들이 잘 커서 자리잡은 게 가장 큰 행복인데, 그럴 수 있도록 밑거름을 깔아주신 분이 강경남님입니다.

어느 곳에 계시온지 모르지만, 모두가 하찮게 여겼던 저를 믿고 도와주셨던 경남도청 강경남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때 베풀어주셨던 고마움 새기면서 도움이 헛되지 않도록 앞으로도 성실하게 살겠습니다. 시험 합격 뒤 자격증 찾으러 도청에 갔을 때 딱 한번 찾아뵌 게 전부인데, 어느덧 19번째 가을을 맞고 있다니 믿기지 않습니다. 죄송하고 또 감사합니다. 진즉 어떤 방식으로라도 찾아뵙고 고마움을 전달하고 싶었는데, 자랑스럽지 못한 과거를 회상하는 게 왠지 망설여졌고, 만나서 요란스럽게 인사하고 그러는 건 더 똑똑한 사람들 몫이라 생각하며 그저 묵묵히 평범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요즘 더 늦으면 안 될 것 같은 죄책감과 압박감이 들었습니다. 편안하고 행복할수록 ‘분명 19년 전 나처럼 힘들어하는 분들이 많이 있을 텐데’란 생각에 마음 한편이 무거웠습니다. 이제 불쑥 나타나 인사하기가 어색하겠지만, 이제라도 따뜻한 밥 한그릇 대접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편으로, 지금 서툴고 삐뚤삐뚤한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바로 당신이 제2의, 제3의 강경남님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부족한 제 얘기로 동기부여가 됐으면 하는 바람 간절합니다. 부러진 날개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새로운 날개가 되어주지 않으실래요?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용기를 주신다면 누군가에게 삶의 전환점이 돼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힘든 이웃에게 영원히 잊히지 않을 또 다른 강경남이 돼주시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지금도 어딘가에서 무거운 짐을 내리지도 못하고 희망에 속고, 또 삶에 속으면서 어렵게 버티고 있을 당신께 꼭 전하고 싶습니다. 당장 메일을 쓰십시오. 도움을 주실 만한 분을 찾아서요. 얼굴을 마주보는 것도 아니니, 부끄러울 것도 없습니다. 두드려야 열립니다. 하루하루 돌아가는 세상이란 톱니바퀴에서 나만 처지고 빠져 있는 것 같다면, 용기 내서 손을 내미세요. 유행가 가사처럼 말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이뤄지기도 하는 게 인생이기에 이 세상은 한번 살아볼 만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잘되기를 응원합니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당신이 되기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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