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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왜냐면

피곤에 찌든 사람들의 나라…언제까지 이렇게 살 것인가

등록 2022-12-28 18:37수정 2022-12-28 18:49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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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김진우 | 건국대 디자인대학 교수·<걷다가 앉다가 보다가, 다시> 저자

지난 여름방학, 안 하던 운동을 하다가 허리를 다쳤다. 더 나빠지면 수술해야 한다는 의사의 경고에 겁이 덜컥 났다. 이러다가 못 걷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다행히 수술은 피했고 서서히 회복했지만, 안방 침대에 누워 천장과 스마트폰을 번갈아 바라보는 것으로 금싸라기 같은 3주를 날렸다. 몸이 아픈 대신 정신은 신기할 정도로 단순 명징해졌다. 더 아프기 전에, 더 나이 먹기 전에 하고 싶은 것을 하자. 몇년째 미뤘던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제주 한달 살기”를 질렀다. 입소문이 난 곳은 이미 일년 전부터 예약이 찬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며칠 전, 제주에 왔다. 느지막이 일어나, 농부 겸 시인인 주인장의 당근밭을 향해 난 창문을 열어, 찬 공기와 함께 달려드는 길고양이 두마리와 눈을 맞춘다. 가로로 내리는 제주의 눈보라를 뚫고 나가 세화해변을 산책하고, 나 혼자만을 위한 식사를 차리고 먹는다. 노트북을 들고 가 온종일 머물 수 있는 마을 도서관과 독립서점이 지척에 있다. 풍요롭고 행복하다.

왜 진즉 오지 못했을까. 나는 일년에 4개월이라는 방학이 있는 직업인이고, 한달간 숙박비를 지불할 수 있는 경제주체다. 스스로 운전하며 이동하는데 어려움이 없고, 당장은 내 손을 꼭 필요로 하는 가족이나 친지도 없다. 하지만 올여름 꼼짝없이 몸이 묶였던 신체적 상황이 없었더라도, 나는 “제주 한달 살기”를 실행에 옮겼을까?

28년 전, 내가 공부했던 덴마크 코펜하겐 학교의 직원들은 매주 금요일이면 점심시간 전에 사라졌다. 약 1시간 정도 떨어진, 주로 바닷가에 있는 세컨드 하우스. 작고 소박한 그곳에서 그들은 가족, 지인과 충전의 시간을 보냈다. 금요일이면 불 켜진 듯 환한 얼굴로 사뿐히 사라지던 그들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나와 내 나라는 도달하지 못한 선진국 삶의 징표였다. 한스 로슬링의 책 <팩트풀니스(Factfulness)>와 갭마인더(www.gapminder.org)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이제 덴마크와 동일한 4단계, 즉 선진국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노동시간은 최상위, 생산성은 하위권이다. 왜 이럴까?

과로에 시달리다가도, 막상 통으로 주어진 휴일 아침 시간에 나는 어쩔 줄 모른다. 성실함은 미덕으로, 게으름은 부덕으로 배우고 자란 탓이다. 여유와 휴식을 즐기거나 누린 적 없는 586세대의 관성은 멈출 줄 모른다. 한달씩 휴가를 가는 바람에 7월의 파리에는 파리지앵이 없다는 사실은 부러워하면서도, 가까이에 있는 누군가가 그런 긴 휴가를 간다면, 특히 젊은 세대가 그런다면 내 반응은 둘중 하나였다. 팔자 좋네! 혹은 제정신인가? 이는 주6일제를 경험했던 50~60대가 주4일 근무제를 더 반대한다는 통계의 근간이다. 어쩌면 대한민국은 제대로 놀고, 쉬고, 자고, 즐기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그 의미와 가치를 체감한 적 없는 피곤에 찌든 사람들의 나라다. 내가 아는 한 빈부, 지위의 격차와도 별 상관없다.

그런 어른들이 말한다. 근로시간을 주 52시간에서 69시간으로 늘리자고. 놀러 갔다 죽은 사람들을 왜 추모하냐고. 가난한 지역 아이들이 왜 배 타고 제주까지 수학여행을 갔냐고. 경제지표가 국내외적으로 최악인데 “제주 한달 살기” 같은 철딱서니 없는 소리 할 때냐며 호통치는 목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하지만 경제가 좋았던 적이 과연 있었던가. 무한증식과 축적만이 본질인 자본에 만족은 없다. 그러니 지금 당장 돈과 시간이 허락하는 사람부터라도 좀 놀고 쉬자. 몸이 부서져라 일만 하다가 어느 날 돌아보니 친구도 취미도 없는 쓸쓸한 노인, 다음 세대에게 윽박지르는 것 외에는 할 게 없는 노인이 되지 않으려면. 그런 사람으로 가득 찬 나라에서 1인당 국민소득 3만5천달러가 무슨 소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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