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왜냐면

‘조용한 퇴사’ 부추기는 누칼협, 세상에 싸고 좋은 건 없다

등록 2023-05-24 18:26수정 2023-05-24 19:03

지난해 8월8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열린 ‘공무원 2023년 임금 7% 인상 및 인력감축 중단 촉구 기자회견’에서 한 참가자가 잔고 0원의 9급 공무원 월급통장 내역서로 9급 공무원들의 낮은 임금 현실을 풍자한 손팻말을 살펴보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지난해 8월8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열린 ‘공무원 2023년 임금 7% 인상 및 인력감축 중단 촉구 기자회견’에서 한 참가자가 잔고 0원의 9급 공무원 월급통장 내역서로 9급 공무원들의 낮은 임금 현실을 풍자한 손팻말을 살펴보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왜냐면] 최진성 | 세종시 초등학교 교사

최근 새내기 공무원들의 이직률이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하급 공무원의 업무 스트레스와 박봉을 언급한 기사 댓글을 보면 ‘누칼협’이라는 단어가 자주 보인다. 누칼협은 ‘누가 칼 들고 협박했냐?'를 줄인 말이다. 사람들은 ‘네가 선택한 것이니 불평하지 마'라고 할 때 이 말을 쓴다. 누가 공무원 하라고 협박한 것도 아닌데 왜 월급이 적다고 불평하냐는 것이다.

누칼협은 치명적 단점이 있다. 구조적 문제의 해결을 회피하는 것이다. 누칼협은 모든 문제를 개인 선택 탓으로 돌린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식이다. 그런데 이 논리대로라면 문제가 있어도 개선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정치에 문제가 있으면 이민을 가야 하고, 노동 조건에 문제가 있으면 이직해야 한다. 모두 잘못된 선택을 한 내 탓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이 합리적 선택을 한다고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개인 차원에서 합리적 선택을 할수록 악화한다. 예를 들어 능력 있는 공무원 모두 더 좋은 보수를 좇아 사기업으로 이직한다면 그 자리는 무능한 사람들로 채워질 것이고, 피해는 국민이 받게 될 것이다.

또 누칼협은 사회 구성원 사이의 연대도 약하게 한다. 연대는 타인이 겪는 어려움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상대가 도와주리라는 신뢰가 있을 때 가능하다. 그런데 ‘하기 싫으면 나가'라는 댓글을 받은 공무원이 다른 직장인의 어려움에 공감하며 힘을 보탤 가능성은 높지 않다. 공무원의 어려움에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며 누칼협만 외친다면 다음에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는 공무원들이 누칼협을 외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누칼협은 부패와 태업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조직학자 애덤스는 공정성 이론에서 ‘사람은 자신의 노력 대비 성과를 타인의 노력 대비 성과와 비교해 균형을 맞추려 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타인보다 노력 대비 적은 보상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균형을 맞추기 위해 보상을 늘리거나 노력을 줄이려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급여를 받지 않던 조선 시대 아전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백성들을 수탈해 부족한 보상을 벌충했고, 적은 급여에 허탈감을 느끼는 일부 현대 직장인들은 받은 만큼만 일하겠다며 ‘조용한 퇴사’(직장을 그만두지는 않지만 정해진 시간과 업무 범위 내에서만 일하고 초과근무를 거부하는 노동 방식)를 하고 있다. 노력 대비 보상이 부족하다는 요구를 무시한다면 많은 공무원들이 부패와 태업의 유혹에 빠질 것이다. 공무원은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사명감 있는 사람이 싸게 부려먹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사명감이 있는 사람은 희귀하기 때문에 많은 보상을 제시해야만 고용할 수 있다. 세상에 싸고 좋은 것은 없다. 처우 개선 없이 공무원들의 희생과 노력만 강조한다면 그나마 있던 인재들마저 공직을 떠나게 될 것이다. 공무원 처우 개선 방안을 심각히 고려해야 할 때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