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법 2·3조 개정 운동본부와 양대노총 조합원 등이 22일 오전 국회 본청 계단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노란봉투법'(노조법 2·3조 개정안)을 8월 임시국회에서 처리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왜냐면] 강성태 |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번 노동조합법(제2조와 제3조) 개정안을 ‘노란봉투법’이라고 한다. 법안은 20년 이상 준비했지만 이름은 10년 전쯤 만들어졌다. 2014년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선고된 47억 원의 손해배상액에 놀란 시민들이 십시일반 4만7천 원씩 노란봉투에 넣어 노동자들을 후원했다. 어려운 처지의 노동자들과 그 가족에 대한 따뜻한 연대와 응원이기도 했지만, 파업을 좁게 설정한 합법의 범위를 벗어났다는 이유로 노동자에게 전 재산의 수십 배에 달하는 손해액을 부담하게 해 종국에 극단적 선택을 강요한 비정한 사용자와 법원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이렇듯 노란봉투법은 벼랑 끝에 몰린 노동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이른바 대기업 강성노조를 위한 것이 아니다.
노란봉투법은 사용자와 노동쟁의의 범위를 확대하고 파업 등에 대한 손해배상책임을 개별화한다. 사용자의 확대는 하청노동자의 근로조건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거나 결정하는 원청은 하청 노조와 단체교섭을 하도록 한 것이고, 노동쟁의의 확대는 정리해고 문제도 단체교섭에서 다룰 수 있도록 해 합법 파업의 범위를 국제기준과 선진국 수준에 맞추려는 것이며, 파업 책임의 개별화는 지난 30년 동안 과도했던 파업 손해배상액을 일부 제한하려는 것이다. 법원의 다수 판결례, 국제규범(특히 우리 정부도 2021년에 비준한 국제노동기구 제87호 협약과 제98호 협약), 한국 정부에 대한 권고들, 네 차례에 걸친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 등을 충실히 반영한 것으로, 대다수 노동법 학자들도 사용자 개념의 확대와 파업 손해배상 책임의 제한을 꾸준히 주장하고 지지한다.
노란봉투법은 헌법상 책임부담 및 책임제한의 원칙인 자기책임 원리에 기반한다. 사용자도 자기가 관여한 만큼 단체교섭 책임을 지고, 노동자도 자기가 참여한 만큼 손해배상 책임을 지도록 한 것이다. 이를 통해 하청노동자가 처한 막막한 상황, 즉 원청은 계약상 사용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또 하청은 실질적 권한과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단체교섭을 회피해 온 상황을 개선하고자 한다. 사용자 확대를 우려하는 분도 있지만, 하청의 노동관계에 관여하지 않는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원청은 사용자에 포함될 염려가 없다.
산업별 교섭이나 업종별 교섭에 원청 노조와 하청 노조가 함께 참여하는 유럽 국가들에서는 원하청 단체교섭을 찾기 어렵다. 그와 달리 기업별 교섭이 주류인 미국과 일본에서는 하청 노조가 원청에 단체교섭을 요구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두 나라 모두 오래 전부터 원청의 사용자 지위와 단체교섭 의무를 인정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1940년대부터 공동사용자(Joint-Employer) 법리를 통해 하청노동자의 기본적인 고용조건을 지배하거나 결정하는 원청업체는 단체교섭 의무를 진다고 하고, 일본에서는 1995년 최고재판소의 아사히방송 판결 이후 하청노동자의 근로조건을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원청은 사용자로서 단체교섭 의무를 진다는 법 이론이 정착해 있다. 지난해 11월 도쿄노동위원회는 우버이츠유니온(Uber eats Union) 사건에서 우버이츠재팬(Uber eats Japan)과 함께 그 운영사인 우버재팬(Uber Japan)도 사용자로서 단체교섭 의무가 있다고 판정했다.
기업 걱정에 노란봉투법을 비판하는 분들께는 그 마음으로 하청노동자들의 근로 조건을 향상시킬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도 함께 고민해 주시기를 감히 부탁드린다. 노란봉투법은 헌법상 자기책임 원리에 충실하게, 그래서 조금은 소심하게 만들어진 법안이다. 다시 말하지만 하청 노조와 단체교섭을 하기 싫은 원청은 하청노동자의 근로조건에 간섭하지 않으면 된다. 국제규범이나 외국 사례도 노란봉투법의 근거는 될지언정 공격의 이유는 될 수 없다. 법 하나 바뀐다고 하청노동자의 상황이 곧바로 나아지지는 않을 터이지만, 그래도 작은 희망은 가질 수 있을 것이다. 20여 년에 걸친 하청노동자들의 힘겨운 노력에 우리 사회의 따뜻한 응원과 대통령의 아름다운 화답이 있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