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당시 학살당한 피해자와 그 아기의 모습에 대한 주민 증언을 토대로 그린 강요배 화백의 ‘젖먹이’. 강요배 화백 제공
[왜냐면] 존 에퍼제시 | 경희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20세기 아시아 역사에서 최악의 민간인 학살은 제주도에서 일어났다.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이 섬에서, 전후 세계는 민족 자결권과 사회정의를 위해 싸우는 토착민들에게 미국이 얼마나 거리낌 없이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를 최초로 목격했다.”
현재 아시아의 다른 쪽 끝에서 벌어지는 인도주의적 위기는 제주 4·3사건에 비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인 또한 1967년부터 이스라엘의 군사 점령에 맞서 민족 자결권과 정의를 위해 투쟁해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재 가자지구를 향한 무자비하고 거리낌 없는 폭력의 빗발침 속에서 제주의 과거를 엿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이 35년 동안의 한반도 점령을 청산한 1945년, 미군의 한국 점령이 시작됐다. 미군에 대한 불만과 분노의 감정은 차츰 고조되다가 그로부터 3년 뒤 제주에서 폭발했다. 존 메릴 전 미 국무부 동북아실장은 “전후 미국의 점령에 이토록 큰 규모로 거칠게 항의한 일은 아시아나 유럽을 통틀어 제주가 유일무이하다”고 짚은 바 있다.
제주도민이 겪었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지난 56년 동안 팔레스타인인은 점령당한 가자지구에서 일상적으로 구타·고문, 사형, 심문, 통행금지, 강제 추방, 재산 파괴, 경제적 제재, 봉쇄, 무차별 폭격 등 다양한 형태의 국가폭력과 공포에 노출됐으며 복종을 강요받았다. 이스라엘 군대가 가자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지구를 점령한 지 20년째인 1987년, ‘인티파다’(intifada)라고 부르는 팔레스타인의 반이스라엘 저항운동이 최초로 일어났다. 주로 여성들이 주도하고 마하트마 간디, 마틴 루터 킹, 미국 정치학자 진 샤프가 부분적으로 영감을 준 이 인티파타는 대부분 비폭력 항쟁이었다.
올해 10월7일 일어난 하마스의 공격으로 가자지구에 거주하는 사람 모두가 처벌받고 있는 것처럼, 1948년 4월3일 항쟁 이후 제주도에 거주하는 모든 시민은 국가 폭력에 무자비하게 노출됐다. 새로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와 미군은 헤이그 조약(1899년)과 제네바조약(1949년)에서 전쟁범죄로 규정하고 금지한 연좌제를 섬 전체에 적용했다. 1948~1954년 약 2만5천~3만명의 제주도민이 학살당했으며 이는 제주도 전체 인구의 10분의 1에 이르는 수치다. 제주도에 거주하는 거의 모든 가족이 국가폭력에 영향을 받았다.
최근 두 달 동안 1만8천여명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망했으며 거의 5만명이 부상을 입었고 7780명이 실종됐다. 가자지구에 거주하는 모든 가족이 국가폭력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제주의 경우 희생자 3분의 1이 노인, 여성, 아동이었다. 가자지구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의 70%가 여성, 아동, 18살 미만의 청소년이다. 적어도 7729명의 아이들이 살해당했다.
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제주도의 산간마을 95%가 파괴됐으며 8만~9만명에 이르는 마을 주민은 강제로 해안가에 위치한 포로 수용소로 보내졌다.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건물 약 90만 동이 파괴됐고 약 80~90%의 가자지구 시민들이 국내 실향민이 됐다.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의 발표를 보면, 거주지에서 강제로 쫓겨난 팔레스타인인은 인구가 과밀한 보호소나 임시 텐트, 옥외 지역에 갇혀 있으며 충분한 음식이나 깨끗한 물, 제대로 작동하는 하수 처리 시스템, 위생시설 없이 삶을 견디고 있다. 결국엔 폭탄이나 미사일로 목숨을 잃은 사람보다 설사나 황달, 홍역, 수막염, 수두, 바이러스성 간염 등 질병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더 많을 지도 모른다.
요아브 갈란트 이스라엘 국방부 장관은 “나는 가자지구에 대한 전면 봉쇄를 지시했다. 전기도, 음식도, 연료도 공급되지 않을 것이며 모든 것이 폐쇄될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탈을 쓴 짐승과 싸우고 있으며 그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리에 킹 예루살렘 부시장은 “그들은 인간도 아니고 심지어 동물도 아니다. 인간 이하의 존재이므로 그에 걸맞게 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쪽의 팔레스타인인부터 동쪽의 한국인까지 아시아 사람들은 종종 비인간적인 고정관념이나 비방에 노출되곤 한다. 필리핀과 일본, 한국, 베트남, 이라크에서 벌어진 학살부터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아시아계 미국인을 향한 무자비한 공격 등은 ‘#아시아혐오를멈춰라’(#stopasianhate) 운동을 탄생시켰다.
이츠하크 헤르초그 이스라엘 대통령은 가자지구의 파괴와 시민학살을 세계적으로 진행 중인 문명의 충돌로 해석하며 “이번 전쟁은 단순히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전쟁이 아니다. 이번 전쟁은 진심으로 말하건대 서구 문명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라고 발언한 바 있다. 미국으로부터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군사적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은 인종차별,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 차별정책), 정착형 식민주의, 인종청소, 집단학살을 적나라하게 자행 중이며 세계 시민들은 눈앞에서 생중계되는 폭력에 아연실색하고 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가자지구에서의 즉각적인 휴전’을 요구했을 때 미국은 유일하게 거부권을 행사했다. ‘미국 예외주의’라는 유해한 생각이 21세기에 번창하고 있는 것이다.
하마스의 끔찍한 공격으로 인해 1200명의 이스라엘인이 목숨을 잃었으며 우리는 이들의 희생을 팔레스타인인과 함께 기려야 할 것이다. 전 세계적인 대규모 반전시위에서 살펴볼 수 있듯 사람들은 이 폭력이 멈추기를 요구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유대인 그룹이 반전시위를 주도하고 있다.
한국은 1953년 정전 협정을 체결하면서 전쟁으로 인한 무의미한 희생을 막을 수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평화 조약을 체결한 적은 없다. 공식적으로는 전쟁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군사비에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어갔고, 이산가족이 발생했으며, 권위주의적 정부가 탄생했고, 여행 제한 조치나 각종 제재, 기근, 의무 군복무 등으로 한반도의 사람들은 고통받았다. 한반도뿐만 아니라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전면전의 위협 속에서 살고 있다.
현재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자행하는 행위를 북한과 중국에도 저지르기를 바라는 강경파가 미국에 상당수 존재한다. 신냉전이 과열할 경우 한반도는 남북한 할 것 없이 폐허가 될지 모른다. 하늘 위로 날아가는 미국의 폭격기에는 “서양의 문명을 지키는 중”이라는 슬로건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번역 이담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