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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스스로 죽지 않으려는 씨알이라니 / 이이화

등록 2012-04-30 19:44

이이화 경남 거창 동호마을 텃밭농사꾼·인문학 편집인
이이화 경남 거창 동호마을 텃밭농사꾼·인문학 편집인
‘진보’란 말이 아름다운 건
아픔 이기며 ‘나아감’에 있건만
보수가 진보의 정책 고민할 때
진보는 어디에 있었던가
유독 변덕스런 일교차로 4월하고도 하순을 바라보는 때까지 저물녘 아궁이에 군불을 지펴야 새벽을 난다. 지리산, 가야산, 덕유산에 에둘러진 마을이다 보니 산의 정령이 내뿜는 기세가 만만찮다. 며칠 동안 한여름 대양을 건너온 폭풍은 저리 가라는 바람이 휘몰아쳐 사군자의 막내 격인 대나무 가지들을 휘청휘청 풀잎처럼 춤추게 만들었다. ‘북극에 흘러내린 눈물로 시름하는 우리 행성에 또 무슨 일이?’ 하는 걱정스런 마음이 앞선다.

그러던 뜨락 매화 가지에 꽃송이가 흐드러지고 두둑을 짓는 감자밭 두렁에 참꽃이 진창 피어오르더니 이젠 개꽃이 짙붉다. 밭갈이하는 흙더미 속에 숨었던 풀싹이 새파랗게 드러나고 땅벌레들이 잠이 덜 깨 허둥대는 모습에 긴 터널을 지나온 강한 생명력을 만난다. 한 조각씩 묻히는 감자 씨알이 스스로 썩어 새싹을 세상에 밀어올릴 때 다시 생명의 신비를 만끽할 것이다. 작열할 태양빛 아래에서 무성할 뭇 생명의 작은 움직임. 이제 진군이다. 흑백 일색의 세상에 알록달록 피어오르는 다채로운 생명의 잔치가 펼쳐질 것이다.

여기저기 겨울을 이겨낸 봄은 생명의 잔치로되, 우리네 세상은 여전히 봄날이 아득하다. 삭풍 너머 봄 햇살을 당연시하던 지난 4·11 총선은 인간 행태의 여러 생각거리를 남겼다. 잠시, 불통 위용을 떨치던 칼바람이 굳은 땅 밀치고 일어서는 파랗게 날 선 싹들에 해제되는 섭리를 떠올렸다. 그렇게 여겨졌으며 그리되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시되던 그것이 마였다. 철 만나 기세에 편승하려는 사욕들이 이내 내 안의 경계심을 무너뜨렸다. 스스로 죽어야 새 생명을 틔워 올린다는 너무나 또렷한 이치를 간과하고 말았다. 경계하지 못하고 성찰하지 못하고 결단하지 못하고 이내 봄인 듯 자만하던 사이 요상스런 바람에 휘둘렸다.

나는 보수인가, 진보인가? 그 물음에 선뜻 자신있게 말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사회의 몇몇 귀중한 가치들은 지켜나갔으면 하니 이는 보수이고, 밭갈이하듯 갈아엎어 새 생명이 싹트게 했으면 하는 것이니 이는 진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정치가 인간 존엄의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희망에서, 민은 반드시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결의에서, 내 본능은 ‘민주’를 좇는다. 우리 역사에 민이 주인이 되지 못해 얼룩진 눈물 자국이 갈피마다 얼마나 허다한가! 민이 주인이 되려 몸부림친 안간힘이 갈피마다 얼마나 빼곡한가! 그러하니 민주를 기치로 내세우는 이는 스스로 죽어 이 막중한 염원을 새 생명으로 밀어올리려는 씨알이 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보수가 오히려 진보의 정책들을 고민하고 (그 진정성은 차치하고라도) 환골탈태에 매달릴 때, 진보는 어디에 있었던가? 도토리 키 재기식 분파로 자기 것 챙기기에 골몰하고 진보연하면서 진보스럽지 못한 처신으로 입방아에 오르내릴 때, 진보는 이미 없었다.

보수가 진보가 되고 진보가 구태가 되어 버리는 요술을 보았다. ‘진보’라는 말이 아름다운 것은 부단히 아픔을 감내하며 ‘나아간다’는 데 있다. 자기를 죽여 새싹을 틔워 내려는 것이 감자씨이건 호박씨이건 나를 향한 엄중한 시련을 가할 때야만 진일보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이제 진보냐 보수냐는, 목젖을 울리는 기치는 버려야 할 것이다. 자신을 죽일 것이냐 민을 죽일 것이냐는, 온몸을 대중 속에 파묻는 기치가 될 것이다. 스스로 죽어 새 생명의 밑거름이 되지 못하는 자, 감자밭 두둑에 묻혀서도 아등바등 저 자신 탱탱한 알맹이로 살아남으려는 자, 이 을씨년스런 바람 너머 다시 봄날을 보지 못할 것이다. 선현이 이르지 않았던가, 사즉필생.

이이화 경남 거창 동호마을 텃밭농사꾼·인문학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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