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자유 논쟁이 뜨겁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이슬람 선지자인 마호메트(무함마드)를 풍자했다는 이유로 <샤를리 에브도> 언론인들이 죽임을 당했다. 한국에서는 진실을 알리겠다는 의도로 전단 뭉치를 풍선에 매달아 이북으로 날려 보내는 이들이 표현의 자유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다른 쪽에서는 그것의 제한을 내세운다. 이 싸움은 종국엔 후자가 이길 수밖에 없다.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 공동체 안에서 그 자유의 범위는 합의의 대상이지 절대적 권리가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자유를 제한하는 데 어떠한 정당화 과정을 거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표현의 내용에 대해 어느 선까지 허용해야 지금의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을지 답해야 한다.
인간은 왜 표현하는가? 우리는 우선 이 물음에 답변해야 한다. 표현 행위는 인간이 가진 어떤 본질적인 욕구로부터 발생하는 것이고, 이 욕구의 충족을 어느 수준까지 허락할 것인지가 우리가 당면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표현 욕구를 이해하기 위해 간단한 사고 실험을 해보자. 만약 인간이 홀로 외딴섬에 살게 된다면, 그는 표현 행위를 할까?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견디기 힘든 외로움, 생존의 고달픔 등에 관해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일기를 쓰는 이유가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것, 곧 표현 자체를 위한 것이거나 자신의 반성적 삶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은 표현 행위가 지니는 개인적 속성을 잘 드러낸다. 개인적 차원에서의 표현의 범위는 사실상 무제한적이다. 표현 행위의 근원과 그것의 영향력이 미치는 대상이 개인으로 국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동체 안에서의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존재의 성격이 바뀌면 행위의 성격도 바뀐다. 개인적 차원에서 표현 행위를 한 것이라고 해도 그 행위가 일어나는 곳이 사회인 이상 그것은 사회적 행위로 전화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표현 행위의 의도 역시 다양해진다. 단순히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넘어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한다든지, 대중의 의식을 전환하여 권력을 쟁취한다든지 하는 여러 현실적인 목적의식을 내포하게 된다. 표현 행위의 근거가 이러한 현실적 욕망에 자리할 때, 표현의 자유는 여타 자유가 그러하듯 일정 부분 제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현실적 욕망에 기초한 표현 행위는 마치 종이비행기를 허공에 날리듯 가볍고 유희적인 것이 아니라 망치 혹은 칼을 던지는 듯한 실질적 파급효과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 점을 표현의 자유의 강력한 옹호자들은 간과하거나 은폐한다. 자신이 하는 일은 한낱 그림을 그리거나 종이 쪼가리를 날리는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표현의 무게에 누군가가 짓눌려 고통스러워한다면, 그것은 더이상 생각의 표현에 그치지 않고 생각의 실현에 가까워진다.
표현의 자유의 허용 범위에 대해 일반적 원칙을 제시하는 것은 힘들다. 상황에 따라 개별적인 사례에서 타당하다고 간주되는 조화점을 찾는 노력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표현 주체가 사회적 관점과 책임감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샤를리 에브도>는 인간의 이성과 자유에 대한 신념으로 종교와 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해왔다. 그들은 자신을 반대하는 이들의 표현의 자유 역시 옹호해왔다고 스스로를 변론한다. 그러나 이는 어쩌면 본인에게 유리한 형태로 기울어져 있는 경기장에 상대방을 초대하는 것과 같을 수 있다. 애초 마음에 들지 않는 경기장에 상대방이 들어서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표현은 태초에 솜처럼 가볍다. 그러나 공중에 흩어지는 순간, 표현은 엄청난 사회성과 역사성을 흡수하여 돌처럼 무거워진다. 표현의 자유는 그 둔중한 전환을 감안해야 한다.
임유 연세대 철학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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