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평등은 양립불능의 개념이 아니다. 상보적으로 응용되어야 한다. 왜 제대로 되지 않았나? 박애를 소홀히 해서다. 박애가 이루는 휴머니즘은 자유와 평등의 토대이다. 휴머니즘에 대한 새로운 성찰은 통일을 이루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다.
금년은 광복 후 70년 되는 해이다. 그동안은 우리가 서구문명 따라잡기인 근대화를 이룩해온 기간이다. 산업화 민주화로 집약되는 근대화 작업은 그 성취 속도에 값한 우리 고혈의 압축이었다. 산업화의 성취도는 상당한 단계지만 민주화의 성취는 국민들의 기대 충족과 아직 거리가 멀다. 이런 터에 우리만의 심각한 고민이 더 있다. 냉전시대 유물인 양대 이념 체제의 대치를 안고 있는 상황이 그것이다. 민족 분단의 벽을 허무는 과제야말로 우리의 숙원사업이다.
남과 북이 다 같이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념의 상이가 각기 다른 체제를 이루었다. 자유에 기초한 자본주의와 평등에 기초한 공산주의가 그것이다. 이 체제들은 두 이념을 소유와 분배라는 경제 관점에서 채택한 것으로 이제는 폐단들마저 꽤 노정하는 판이다. 자본주의는 빈부의 극심한 격차와 도덕적 해이를 야기하고, 공산주의는 생산율의 저하와 인권 소홀로 인한 사회경색과 도덕적 부실을 초래한다.
민족 분열의 극복을 위해 이 폐단들의 불식이 시급함은 더할 나위 없다. 이에 요망되는 방안은 두 이념 중 어느 하나에 편중하는 형식을 지양함일 것이다. 응용에 따라 자유와 평등은 상충 상극되는 성향을 띤다. 평등을 위해 자유가 제약받든지 자유의 신장으로 평등에 차질이 생기는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이것들은 근본적으로 양립불능의 반대개념이 아니다. 폐기되어서도 결코 안 된다. 두 이념은 우리 생활에 필수불가결한 요건으로 상보적으로 응용되어야 할 원리들이다.
개인의 사생활을 위한 인권 차원에서 자유는 반드시 필요하고, 평등 또한 사회인 생활을 위한 민권 차원에서 절실히 요구된다. 편향적 응용을 지양하고 상보 유기적으로 응용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미 원숙을 지향하는 일부 국가들에서 인권과 민권을 다 국민의 기본권으로 정하고 있는 사실로도 이점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이 이념들의 상보 또는 유기적 응용이 왜 제대로 되지 않았나? 그 사상적 원인을 필자는 프랑스 혁명에서 이 이념들과 함께 제시된 박애(博愛)를 너무 소홀히 한 데 있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아래와 같다.
박애는 인간을 무엇보다도 존귀시하는 휴머니즘을 이루게 마련이다. 그 휴머니즘의 역할은 자유와 평등의 토대를 이루면서 두 이념들을 인간옹호라는 한 목표에 초점을 두고 구현토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박애는 이 이념들의 두 축을 상보의 관계로 굳히는 요인임에 틀림없다.
박애의 이념화 논의는 필자에게 이와 맞먹는 공자의 인(仁)을 떠올리게 한다. 공자는 인을 ‘사람 사랑’(愛人)이라 했고, 한유 같은 학자는 인을 아예 박애라 했기 때문이다. 공자의 정치설이 인정이라 불리고, 인정의 내용이 애민 위민 민본의 성격을 띠는 것도 인이 지닌 사랑의 성향에 말미암는다.
공자에 따르면 인은 “나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미루어 남을 대하는” 태도로 구현된다. 집약해 호의적 배려로 실현되는 원리적 개념이 인이다. 호의적 배려는 내가 자의로 실행하는 점에서 자유의 특성을 지녔고, 남의 인격을 존중하며 그의 존재를 나와 동등시하는 평등의 특성도 암묵리에 함유했다. 자유와 평등의 미분화된 특성을 원천적으로 함재한 것이 인의 배려다. 따라서 배려로 구현되는 인의 원리 또한 박애와 같은 휴머니즘의 특성으로서 윤리와 정치의 이념으로 응용될 수 있다.
실제로 공자의 정치설 중에는 인설과 더불어 오늘날에도 설득력을 지닌 이론이 있다. 정치에서 행해야 할 이념적 요목은 특히 균등(均)과 화합(和)과 안정(安)이라는 것이다. 이유는 균등은 탐욕을 없애주고, 화합은 인구(또는 국토)의 적음을 극복하게 하고, 안정은 쇠망을 막아준다는 데 있다.
공평한 균등은 평등과 별다르지 않고, 인간들이 스스로 몰릴 만큼 화락한 화합에는 의지의 자유가 전제되었으며, 안보 곧 국방과 직결된 안정은 또 균등과 화합의 성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에 공자의 이 이념적 이론에도 자유와 평등은 물론이고, 특히 화합에서는 그것들의 ‘통합 성향’까지 읽힌다.
남과 북이 다 같이 ‘민주공화’를 지향하는 마당에 공자 등의 본원유학에서 추구한 중화(中和) 개념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이때의 중은 어느 편에도 기울지 않음이고, 화는 기울지 않음으로써 화해로운 화합을 가져오는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인 것이 이기의 묘함”이라 하던 논리도 전통사상의 지혜다. 우리 전통사상의 이런 지혜들을 설득력 있게 구현한다면 우리 나름의 휴머니즘을 토대로 새로운 민주주의를 출발시킬 수 있지 않을까 추단한다.
누구는 이 대목에서 근대화 자체가 르네상스 이후 휴머니즘적 각성에서 출발하였음을 지적할 것이다. 사실 자연 상태의 중요시로 출발한 서구의 근대사상은 신성(神性) 또는 영성으로부터의 자연적인 인간 해방이라는 휴머니즘 시각에서 나왔다. 그런데 그 서구의 휴머니즘은 인간의 육체적 욕구 충족만을 위한 인간관으로 이룬 사상이다. 그것의 약단점이 이에 있다.
인간은 본래 육체적 욕구와 함께 이지적 및 기예적 욕구를 함유한 존재다. 인간이 이런 만큼 앞으로 휴머니즘은 생존을 기본으로 하되 이 욕구들을 다 아우를 내용과 성격으로 되어야 한다. 서구의 휴머니즘에 기초한 근대화는 비유하자면 동물적 욕구로 인한 투쟁과 혼란을 예견한 순자 사상 부류에 따라 이룬 것이다. 거기에는 맹자 사상 종류에 해당될 성격이 너무 결여됐다.
휴머니즘에 대한 새로운 성찰은 우리가 당면한 통일을 이루는 데서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다. 이것을 거친 다음에야 이념들의 상보 또는 유기적 응용이 원활히 될 것이다. 두 이념의 상보 또는 유기적 응용은 사실상 두 정치의 화합적 극복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다. 문제는 이 작업들의 지난함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 난제의 해결이 결코 불가능하지 않으리라 예단한다. 우리의 전통사상을 일구어온 지난날의 원효 이황 이이 등은 종합 또는 화합의 능력을 펴는 데 뛰어났고, 지금 우리는 그 유전인자를 이어받았을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윤사순 고려대 명예교수
윤사순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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