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7일, 파리에서 일어난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에 대한 논의가 끝날 줄 모른다. <한겨레> 지상에서도 여러 칼럼니스트와 독자가 의견을 밝혔다. 그 가운데는 <샤를리 에브도>의 풍자가 약자를 향한 폭력이라는 주장이 많다. 샤를리 에브도의 과격한 풍자를 꾸짖는 사람들은 상식처럼 보이는 ‘표현의 자유’가 알고 보면 서구 중심주의적인 폭력이며 서구 세속주의자에게만 유효한 무기라고 비난한다. 풍자를 당하는 이슬람은 서구 주류 사회 안의 절대 약자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진정한 관용은 약자를 보살피고 개별성을 배려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오만한 서구 대 핍박받는 이슬람’이라는 구도로 이번 사건을 본다. 하지만 그런 설명은 쿠아시 형제를 지도한 이슬람근본주의에 눈감는 반쪽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영미 제국주의가 중동에 심어놓은 이스라엘이 이슬람근본주의를 불러왔다거나, 쿠아시 형제가 이슬람근본주의에 심취하여 예멘 알카에다와 접속하게 된 원인 또한 프랑스 다문화주의 정책의 실패에서 찾는 분석이 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인도 소설가 살만 루슈디는 1988년, 영어로 집필되고 출판된 <악마의 시>라는 소설에서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와 코란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이듬해 이란의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로부터 사형(Fatwa)을 선고받았다. 현재 루슈디는 330만달러의 현상금을 목에 걸고도 생명을 부지하고 있지만 이탈리아·노르웨이·터키의 번역자는 피습을 받고 중상을 당했으며, 일본인 번역자 이가라시 히토시 교수는 자신이 근무하던 쓰쿠바대학교 캠퍼스 안에서 칼을 맞고 죽었다. 루슈디와 <악마의 시> 번역자들은 하나같이 이란 사람이 아닌데, 이란의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무슨 권한으로 타국의 국민에게 사형 선고와 그것에 준하는 처벌을 선동할 수 있었던 것일까? 각 나라의 주권과 국제법을 괘의치 않는 이슬람근본주의가 있는 한, 세계는 여전히 교황이 파문권을 행사하던 중세다.
세계화와 세속화에 직면해 앞으로 점점 증가하는 풍자와 조롱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슬람의 운명이다. 이슬람권 안에서도 가장 자유로운 나라에 속한다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여성이 운전을 할 수 없고, 이집트 여성은 청바지를 입을 수 없다. 이슬람 율법이 강한 국가에서 여성이 남자 의사의 진료를 꺼리다가 죽어가거나, 강간을 당한 누이를 남자 형제들이 ‘명예살인’하는 것도 다반사다. 그런 나라에서 이슬람을 비판하거나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아예 자살 행위다. 이런 모든 것들이 이슬람을 풍자하고 조롱하는 근거가 된다. 이슬람은 그때마다 테러로 응수할 텐가? 설령 누가 진지하고 예의를 갖춘 비판을 하더라도 오늘 같은 상황에서는 테러를 피하기 힘들다.
관용은 샤를리 에브도 사건 이후 가장 많이 들먹여진 용어다. 모두들 관용에 대해 한마디씩 하지만, 관용의 가장 타락한 사용법은 ①상대방을 아이로 취급하면서 상대방의 환상을 깨지 않으려는 태도이며, ②어떤 진리든 진리를 주장하는 것은 모두 폭력이라는 발상에서 출발한다. 즉 우리는 ①, ②의 태도와 발상을 간직한 채 이슬람을 ‘아이’ 취급하고, 그들에 대한 이의 제기를 ‘폭력’ 행사나 되는 양 자기 검열을 해온 것이 아닌가? 과격하게 말해, 비판이 필요한 근본적 차이를 문화적 차이와 생활 방식의 차이로 변질시키고, 미소 띤 얼굴로 표현의 올바름에만 신경을 써온 허다한 프랑스 지식인들의 타락한 관용이 풍자만화가들을 참극으로 내몬 게 아닌가?
결코 이슬람은 약자가 아니다. 이슬람은 천주교와 개신교를 합한 숫자를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가진 종교다. 이슬람은 고령화되어가는 다른 종교와 달리 가장 많은 20대 신도를 가졌다. 서구로 유입되는 이민의 대다수도 무슬림이다. 이슬람은 서구를 향해 자신을 아이 취급하고 예외로 다루어 달라고 더는 징징거리지 말아야 한다. 이슬람이 진정 유서 깊은 역사와 지혜를 간직하고 있다면, 그들이 길러온 문화의 힘으로 풍자와 조롱에 맞서야 한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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