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교육부는 최근 ‘이달의 스승’으로 선정한 최규동(전 서울대 총장)씨가 친일 논란에 휩싸이자 선정 여부를 재검증한다고 밝혔다. 문제가 된 것은 ‘중동학교장 최규동’의 명의로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관변단체인 조선교육회 기관지 <문교의 조선>에 일본어로 기고한 ‘죽음으로써 군은(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다’라는 제목의 글이다. 이 글은 ‘징병제도 실시의 감격’이라는 특집기획에 실린 네 편의 글 가운데 하나이다. 다른 세 편의 글을 쓴 사람은 연희전문학교장 이동치호(윤치호), 한성상업학교장 금본헌명(김주익), 휘문학교장 홍산범식이다. 네 명 모두 학교장 명의로 글을 기고했다는 것은 최소한 명의를 도용한 것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설사 강요에 의해서 집필했더라도 그것이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조하는 친일행위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도 교육부와 교총은 이 글의 진위 여부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일부 행위를 침소봉대해 삶 전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창씨개명 거부, 우리말 수업과 훈시, 진단학회 찬조위원 적극 참여 등을 “확인된 항일운동과 민족교육”의 구체적인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창씨개명 거부가 항일운동의 구체적인 사례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지적된 바이다. 김성수, 최남선, 방응모 등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또한 최규동씨가 국어(일어)상용화가 의무화된 일제 말기의 상황에서 우리말 수업을 하거나 조회 때마다 우리말 훈시를 한 용기 있는 인물이었다면 징병제를 찬양하는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중동학교는 일제의 탄압으로 주 2회 실시하던 조선어 교과를 폐지했다고 자신들의 교사(校史)인 <중동80년사>에 적고 있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진단학회 ‘후원위원’을 항일운동의 대표적인 공적으로 내세운 것도 교총이 당시 역사에 얼마나 무지한지를 잘 드러내는 사례이다. ‘찬조위원’의 정확한 명칭은 ‘찬조회원’으로 잡지 발간을 경제적으로 후원하는 회원을 말한다. 찬조회원 중 가장 많은 후원을 한 것은 윤치호 일가와 김성수 형제이고, 잡지를 주도한 이병도는 <진단학보> 제10권(1939) ‘권두어’에 “황국(皇國: 일본)의 전승(戰勝)과 국가의 약진을 경축하여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고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글을 실었다. 이러한 사실은 진단학회를 후원한 사실이 결코 항일운동의 자랑스러운 경력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위의 행적으로 미루어 볼 때 최규동씨가 시대를 초월하여 온 국민의 존경을 받는 민족의 사표에 적합한 인물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교육부가 애초에 투명하고 공평한 심사를 했더라면 이번 사태가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교육부는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교육부와 교총의 이러한 태도야말로 “명확한 사실관계 확인 없이” 교육사업에 끼친 “고인의 업적과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다.
다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한 인간의 삶 전체가 부인되거나 일반인들에게 왜곡된 이미지로 각인되고 있는 점은 우려스럽다. 최규동씨는 재정이 어려운 야학 중동학교를 인수해 종교단체나 독지가의 후원 없이 사립학교로 키운 존경받는 모범적인 교육가였다. 물론 이러한 행적이 교육부나 교총의 주장처럼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조한 그의 친일 행적에 면죄부를 줄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오히려 우리는 친일 행적이 드러난 그의 삶을 통해 일제강점기라는 억압과 폭력의 시대를 다양한 시선으로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올해는 해방과 분단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극단으로 치닫는 최근의 한국 사회를 고려할 때 식민과 분단, 전쟁이라는 극한적인 시대를 반성과 화해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단, 이러한 화해도 가해자 측의 반성이 전제되지 않을 때에는 공염불에 불과하다. 갈등을 넘어 진정한 반성과 화해의 역사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 고민해야 하는 이유이다.
배경식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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