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밀어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소설 <백의 그림자>의 주인공 무재는 ‘슬럼’이란 낱말의 폭력성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현실에 담긴 수많은 이들의 생존, 삶, 고통. 그 수많은 절절함을 하나로 정의해 버리는 단어는 그 자체로 때론 폭력이 된다.
며칠 전. 커피숍 안에서 창밖을 지나가는 할머니를 보았다. 허리를 채 펴지도 못한 할머니는 파지를 가득 실은 유모차를 느린 화면처럼 끌고 가셨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연약한 할머니와 산더미 같은 파지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할머니의 다리는, 그렇게 온 동네를 걷고 걸어, 고물상으로 향하실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 하루 ‘걸음값’은 천원 지폐 한두 장이 될 것이다.
20년 전에도 파지 줍는 노인들이 이렇게 많았던가. 지금. 대한민국 어디든 파지를 줍고, 찾아 헤매는 노인들을 마주한다. ‘고물상’은 ‘고물을 수집, 매매하는 곳’이란 한 단어로 명명하기에 수많은 노인들이 생존과 마주해야 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해방 후 삶의 터전을 잃은 수많은 서민들이 헌옷, 파지, 고철을 주워 생계를 유지했던 그 시절의 그 아픔처럼, 고물상은 다시 대한민국 노인의 생계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자본’의 셈법에 수많은 이들의 생존은 담겨지지 않는다. 대기업들은 ‘도시광산산업’이란 이름으로 고물상에까지 진출하고 있다. 65살 이상 모든 노인에게 현금 20만원을 주겠다고 했던 공약은 빈곤층 노인 40만명에게는 혜택이 가지 않는 ‘공허함’만 남겨놓았다. 그 결과 수많은 ‘슬럼’은 ‘언젠가는 밀어버려야 할 구역’ 이외에 그 어떤 의미도 갖지 않는다. 빈약한 정책과 이기심의 자본은 ‘밀어버림’ 이후의 ‘생존’은 보지 못한다.
모든 것이 ‘돈’의 값어치로만 계산되는 세상이다. 벼랑 끝에 매달린 이들의 삶은 그 계산법에서 비켜서야 한다. 그들은 ‘우리’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들의 삶을 담아내지 못한, 하나의 단어. 시각은 그 자체로 폭력이 된다. 우리는 잘못된 계산법에 그들의 삶을 담아야 한다. ‘파지’ 한 장에 자신의 삶을 매달아야만 하는 ‘비현실’을 멈춰야만 한다. 그래야 그들의 현재도, 우리의 미래도 괜찮을 수 있다.
문정빈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