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아저씨는 멋들어진 유화를 그리는 내내 연신 ‘쉽다’는 말을 했다. 텔레비전 앞에서 해바라기처럼 고개를 치켜들고 바라보던 내게 그의 ‘참 쉽죠?’라는 말은 정말이지 인상적이었다. 물감이 마르기도 전에 그 위에 다시 덧칠을 해나가다 보면 어느새 알래스카의 침엽수림이 뚝딱 완성되는데, 마치 마술을 보는 듯 신기했다. 그러고선 ‘참 쉽죠?’라니. 세계적인 화가 밥 로스는 그의 프로그램 주 시청자가 나 같은 어린아이라는 것을 모르는 듯했다. 현란한 손기술과 대비되는 그의 말투. 마냥 신기하고 우스웠다. ‘참 쉽죠?’라는 말을 수십, 수백번을 들어도 그의 그림 그리기가 쉬워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봤다. 그림에는 관심도 소질도 없는 나는 그렇게 매주 <그림을 그립시다>를 봤다.
그리고 20년이 흘렀다. 지금은 ‘어때요. 참 쉽죠?’라는 말을 아무도 하지 않는다. 요즘 같은 시대에 ‘쉬운’ 단어를 내뱉기가 쉬운 일은 아니니까. 외려 아프니까 청춘이란다. 우리네 삶은 원래 힘들고 원래 고달프다는 수행자적 사상이 득세한다. 학생들은 입시 지옥, 청년들은 3포 세대, 직장인들은 미생(未生)에다가 노인들은 고독사이니 삶이 어려운 건 사실일 게다. 샐러리맨의 신화적 인물이 청년들에게 ‘어때요. 취직 참 쉽죠?’라고 말한다면? 맞아 죽기 딱 좋은 소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삶은 쉬운 거라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쉬운 일이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삶이 힘든 건 나도 알고 옆집 재영이도 알고 뒷집 뽀삐도 다 안다. 그림 그리기가 어려운 건 나도 알고 옆집 동욱이도 알고 뒷집 석만이도 알았다. 하지만 밥 아저씨는 쉬운 일이라며 사람 좋게 미소 지었다. 만약 회화는 어려운 일이라고, 너희 같은 꼬맹이들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라고 그가 말했다면, 어떤 꼬맹이들이 매주 회화 프로그램을 시청했을까. 나는 그를 보며 회화라는 것을 알았고 wet-on-wet(처음 칠한 물감이 다 마르기 전에 다음의 물감을 칠하는 기법)이라는 회화 기법 개념도 배웠다. 밥 아저씨의 말과 미소엔 긍정 에너지가 넘쳤다.
따지고 보면 삶이 언제는 고달프지 않았겠는가. 수렵생활을 하던 원시인에게도, 아궁이에 불을 때던 조선 사람에게도 그리고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언제나 삶은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삶은 쉬운 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쇼펜하우어가 생각의 힘을 강조했듯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쉽다고 생각하면 쉬워질 테다. 아픈 게 청춘이라고? 그렇게 위로해 주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될까. “우리는 모두 힘들어. 무슨 일을 해도 힘들어”라는 말이 우리를 정말로 힘들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우울과 절망을 전파하기보단 서로의 에너지를 끌어내보자. 이렇게.
“어때요. 참 쉽죠?”
김준영 고려대 중문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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