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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4·19, 의례의 ‘날’에 그쳐선 안된다 / 권오중

등록 2015-04-16 18:31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우리가 기념해야 할 역사적 사건 가운데 4·19처럼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한 사건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정도로 과거에는 정부 차원에서 4·19가 지닌 위상을 오도하고 폄하시키려는 작업이 추진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주장이 과장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도 53년 전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보려고 한다.

1962년 4월19일 오전 10시, 4·19혁명 2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의례가 서울운동장(이후 동대문운동장, 현재의 DDP자리)에서 개최되었다. 이 행사를 주관한 이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으로서 그는 대통령 권한대행의 자격으로 식전에 참석하였다. 우선 눈길을 끌었던 것은 식장 중앙 단상 위에 가로로 걸렸던 행사의 성격을 알리는 대문짝만한 현판이었다.

‘제2회 4·19의 날’. 4·19혁명 두 돌을 기념하기 위한 국가행사에서 4·19를 ‘날’이라고 표현한 것은 무례하다고 할까 불손하다고 할까 매우 적절치 못한 표현이었다. 그렇지만 이 표기는 현대판 무인정권시대를 연 박 의장의 의중을 정확히 꿰고 있었다. 그는 기념사를 통해 “4·19는 민주 역사상 불멸의 금자탑”이라느니 “5·16혁명은 4·19의거의 연장”이라는 등 상투적 찬사를 늘어놓았지만 정작 그는 4·19에 부여된 혁명이란 타이틀을 갈취한 상태였다. 그는 ‘혁명’과 ‘의거’라는 단어에 서열을 매기고, 자신이 주동한 5·16은 혁명이요 4·19는 의거라고 차별을 두었다. 망언의 대열에는 언론매체들도 참여하여 군사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불과 1년 전의 4·19 기념일만 하더라도 신문사 활자선반에서 가죽 ‘革’ 명령 ‘命’이란 활자가 소진될 만큼 신문들이 ‘혁명’이란 단어로 도배를 하더니, 쿠데타가 성공한 모습을 보이자 4·19를 표현하던 혁명이란 단어는 소리 소문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 4·19 의식은 쿠데타 세력이 독재자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더욱 형식적이고 초라한 행사로 변모해갔다. 4·19의 혁명이란 표현을 대신하여 계속해서 ‘날’ 또는 의거로 불렀는가 하면, 기념식의 장소도 서울운동장에서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으로 그리고 때로는 국립극장으로 옹색해져 갔다. 행사에 참석한 정부 대표도 대통령에서 총리로 그리고 어느 시기엔 장관으로 격하되기도 하였다.

4·19혁명의 영령들과 유족들이 겪었던 가장 큰 고초는 묘역 문제였다. 만 2년이 넘도록 대책이 마련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폐가나 다름없는 이기붕의 집을 열사들 유골의 임시 봉안소로 사용해야 할 정도였다. 만약 61년 쿠데타가 없었다면 열사들은 서울 남산에 조성된 ‘4·19공원’에서 현재까지 영면하고 있을 것이다.

‘4·19공원’은 61년 연말에 완공될 예정이었지만 쿠데타로 인해 공사 도중 계획을 접어야 했다. 이후 몇년의 표류 끝에 마련된 것이 현재의 수유리(동) 묘역이다. 이곳은 북한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어 간혹 속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명당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그곳은 사실 격리된 유배지이자 유폐된 공간이었다. 1960년대의 이곳은 서울 사람들에겐 ‘수유’(水逾)라는 의미 그대로 산 넘고 물 건너의 외떨어진 장소였다.

어린 묘목이 훌륭한 재목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적당한 영양소를 필요로 하듯 하나의 사건이 역사적 사건으로 진화하는 과정도 따듯한 손길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4·19에는 지금껏 제대로 된 보살핌이 없었다. 오히려 4·19라는 수목을 훼손하고 고사시키려는 음모가 무성한 실정이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4·19가 생명을 유지해올 수 있었던 것은 4·19가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는 웅건함 때문일 것이다. 그 정도로 4·19혁명은 세계 시민의 역사에서 커다란 자취를 남겼다. 그렇지만 4·19의 현재 모습은 지치고 메말라 골격만 앙상한 상태이다. 시민 된 입장에서 이를 더 이상 방치한다는 것은 4·19를 유폐시키고자 했던 독재자의 전철을 밟는 행위가 되지 않을까. 4·19를 치유하기 위해선 그 정신과 가치를 우리의 일상으로 끌어내는 일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선 우선 여러 형식과 장치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거리, 광장, 국경일, 교과서 등등. 이제 4·19는 더 이상 수유동 골짜기에서 분향과 묵념으로 넘기는 껍질뿐인 의례의 ‘날’이어선 안 되겠다.

권오중 전 영남대 교수·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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