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의사 하면 양손에 수류탄을 든 사진으로 무단적(武斷的) 테러리스트로 연상되기 쉽다. 과연 의거 당시 윤봉길의 내면은 어떠하였을까?
1932년 4월27일 윤봉길 의사는 이틀 후 의거를 앞두고 현장 훙커우공원(현 루쉰공원)을 답사하고, 숙소인 동방공우로 돌아와 김구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김구가 “최후를 앞두고 경력과 감상 등을 써 달라”고 하자, 윤 의사는 즉석에서 평소 가지고 다니던 중국제 연습장에 ‘자서약력’과 유시 4편을 써서 김구에게 주었다. 2005년 공개되어 보물로 지정된 그의 유시 4편 중에서 어린 아들에게 남기는 ‘강보(襁褓)에 싸인 두 병정(兵丁)에게’, 의거를 지휘한 김구에게 드린 ‘백범 선생에게’, 조국의 애국청년들에게 남긴 ‘수필’ 등은 쓴 연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신공원(훙커우공원)에서 답청(踏靑)하며’(그림, 매헌 윤봉길전집 1권 51쪽)라는 시는 자못 서정적이어서 유서로서 의외이다. 우선 시를 보자[( )는 원문].
무성한 봄풀들이여/ 내년에도 봄기운 돌아오거든(明年에 春色이 일으거든)/ 왕손과 더불어 같이 오게나(王孫으로 더부러 갓저오세)// 푸르른 봄풀들이여(靑靑한 芳草여)/ 내년에도 봄기운 돌아오거든(明年에 春色이 일으거든)/ 고려(高麗) 강산에도 다녀(단녀)가오// 다정(多情)한 봄풀들이여(芳草여)/ 금년 4월29일에/ 방포일성(放砲一聲)으로 맹세(盟誓)하셰.
윤 의사는 1932년 10월 ‘자술서’에서 이 유시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상해 신공원의 식장을 미리 조사하러 갔을 때 내가 밟은 잔디가 그대로 일어서지 못하는 것도 있고, 또다시 일어서는 것도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인간도 또한 강한 자로부터 유린되었을 때 이 잔디와 하등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고 대단히 슬픈 감정이 샘솟아 났다. 그 감정을 유서로 썼다.”
그러니까 4월27일 훙커우공원은 초록의 봄풀 잔디로 가득하였는데, 이 잔디는 윤 의사와 마찬가지로 강한 자로부터 짓밟히는 동료이자, 이에 항거하여 다시 일어서는 동지였던 모양이다. 시의 3연에서 윤 의사가 그런 봄풀 잔디와 더불어 4월29일 수류탄을 던지는 의거(방포일성, 放砲一聲)를 맹세했다는 것은 그가 풀처럼 아무 가진 것이 없는 약자임과 동시에, 끊임없이 살아나는 자연의 천리와 함께한다는 자부의 표현이기도 하여, 자못 그 의미가 심장하다.
그런데 윤 의사는 1연과 2연에서 그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을 내년에도 봄풀 방초(芳草)와 함께할 것임을 노래하고 있다. 이것을 이해하는 데 핵심어는 첫 연 마지막 구절 “왕손”(王孫)이다. 중국 남방문학을 대표하는 <초사>(楚辭) ‘초은사’(招隱士)에 “왕손은 가서 돌아오지 않고(王孫遊兮不歸)/ 봄풀만 무성하게 자랐네”라는 구절이 있다. 해마다 봄풀은 무성하게 다시 돋아나건만, 한번 떠난 임(왕손)은 돌아오지 않음을 애석해하는 내용이다. 이후 봄풀의 초록은 떠나간 임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으로 널리 회자되었다.
윤 의사는 1930년 3월6일 23살의 젊은 나이로, 더욱이 둘째 아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는데,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는 비장한 글귀를 남기고 중국으로 출발하였다. 그해부터 3년간 조국에도 초록의 방초는 어김없이 다시 찾아왔지만, 집 나간 윤봉길은 돌아올 수 없었다. 훙커우 의거 이후 그는 죽임을 당할 것이고, 이제 영영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년에도 이국인 훙커우공원에도, 조국의 고향에도 봄풀은 분명 무성할 것이다. 윤 의사는 그의 영혼이 이 초록의 방초로 다시 살아나 임(왕손)을 만나고 고향으로 돌아가길 간절히 기원한 것이다. ‘초사’ 이후 방초는 흔히 임과의 이별을 상징하였지만, 윤봉길은 집 나간 임과 만나는 초록이 되어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겠다는 것이다.
망명 이전 윤봉길은 조국에서 고향인 농촌을 사랑하며 계몽하고자 혼신으로 노력하였다. 당시 그가 하늘의 섭리에 따라 아무런 장애 없이 쑥쑥 자라는 자연의 생명력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지니고 있었음은 그의 한시집 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는 망명 전해인 1929년 만물을 회생시키는 봄기운의 왕성한 약동을 기리어 “운기왕연 만물회춘”(雲氣汪然, 萬物回春)을 휘호로 남기기도 하였거니와, 의거 현장에서 노래한 방초의 생명력을 고국에서 이미 7언 율시로 노래한 바 있으니, 그것이 ‘방초’(芳草)라는 시이다.
이 시에서 그는 초록 방초의 무성한 생명력과 그윽한 향기를 미인 서시와 같이 아름답다 찬미하고, 이런 아름다운 방초를 두고 집 떠난 임(왕손)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노래하였다. 그런데 이 시의 마지막 연은 반딧불이로 끝난다: “가을서리로 끝내 썩지 않을까 겁내었는데/ 밤마다 빛을 내는 반딧불이 되었네(光生夜夜化流螢)”. 반딧불이라….
중국 <예기> ‘월령편’ 음력 6월조에 “부초위형”(腐草爲螢)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무성한 생명력의 방초들이 가을이 되면 초록을 잃고 썩게 될 터 밤 반딧불이로 변한다는 전설이다. 고향에서 ‘방초’를 노래할 당시 왕손은 백마 타고 해방을 가지고 오는 어떤 위인이며, 이에 대한 방초의 절절한 그리움을 전하는 반딧불이는 윤봉길 자신의 심정이었을 터, 그는 왕손을 찾는 반딧불이처럼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유언시 ‘신공원에서 답청하며’를 통하여 훙커우 의거 후 왕손과 더불어 그리운 고향의 방초로 돌아가겠다고 응답한 것이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봄은 왔고, 초록의 봄풀들은 무성히 자랄 것이며, 그 초록의 끝자락에서 반딧불이가 나타나 밤하늘을 밝힐 것이다. 아마도 윤 의사의 영혼도 방초의 초록과 반딧불이의 빛으로 천지간 어디엔가 남아 있을 것이다. 윤 의사의 가슴속에 늘 방초와 반딧불이의 절절한 심정이 있었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수류탄을 넘어 그의 본면목을 보는 것이며 그가 가리키고자 한 달을 보는 것이리라. 그것은 파괴를 위한 테러가 아니라 자연이 준 생명력과 본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리라.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