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급식 모습. 사진 출처 한국전쟁 60주년 사진집
#1. 먼저 고사 한자리.
제나라에 검오라는 밥퍼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어느 흉년에 밥을 지어 불쌍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었겠지요. 마침 초췌한 행색의 나그네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자네 형편이 꽤나 딱해 보이는군그래, 끼니라도 때우고 쉬어 가시게나” 하자 그 나그네 “나는 지금껏 불쌍하다고 주는 밥을 안 먹어 이리됐지요” 하며 자기 길을 가더라는 것이지요.
#2. 이제 제 이야기 한자리.
그 일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제가 피란 나와 종로국민학교 6학년에 갓 편입한 때였습니다. 이웃 휘문중학에 주둔한 미군부대에서 점심 굶는 아이들을 위해 우유를 원조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으로 학교에서 죽을 끓여 점심 굶는 아이들을 먹이기로 했나 봐요. 어느 날 아침 조회 시간에 담임선생님이 제 이름과 함께 두 명의 이름을 부르시더라고요. “너희들은 오늘부터 점심시간에 숙직실에 가서 우유죽 타 먹어!”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그 어리둥절한 시간에 저는 반 아이들 앞에서 우유죽을 타 먹어야 할 가난하고 불쌍한 놈으로 확실하게 낙인찍힌 것이지요. 무심한 시간은 흘러 점심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배 속은 먹으면 어떠냐 하고, 머리는 네가 거지냐고 아우성치고 참 힘들었어요.
그러나 망설임이 길지는 않았어요. 그날 점심시간에 저는 평소에 하듯 죽 가마가 걸린 숙직실이 건너다보이는 운동장 한구석을 어정거리며 그 잘난 자존심 하나로 뱃구레를 옥죄어 오는 허기를 참고 있었더랬죠.
그러나 웬걸요. 점심을 후다닥 해치운 반 녀석들이 아직 입가심도 않은 채 김치며 콩장 냄새 풍기며 달려와서 나의 양편 팔을 한쪽씩 꿰어 잡고 또 한 녀석은 뒤에서 밀며 저를 우유죽을 끓이는 숙직실로 끌고 가는 것이었지요.
“얌마! 우리 같이 가서 먹어 보자 양키 우유 좀….”
그때 우리는 애 어른 없이 미군 것이면 똥이면 어떠냐는 식의 미군 물자에 대한 선호가 있을 때였죠. 그렇게 끌려간 가마 곁에는 양호 선생이 서서 양재기를 들고 줄 서 있는 아이들에게 우유죽을 한 국자씩 부어주었어요. 녀석들의 강권에 밀려 우유를 한 양재기 받아 들고 서 있는데 점심을 끝낸 많은 학생들이 호기심으로 몰려와 숙직실 앞을 메웠어요. 그때 갑자기 나는 가난하지도 않고 불쌍하지도 않다는 생각과 함께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대한 연민과 함께 울컥 수치감이 치솟더라구요.
결국 나는 그걸 못 마시고 양재기를 내 옆에서 호기심으로 껄떡이는 녀석들에게 넘겨줬어요. 얻어먹는 것을 얻어먹는 놈들은 잘만 먹데요. 그랬어요 나는 그때 내 안에는 밥만으론 채울 수 없는 더 큰 배고픔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어요.
물론 나는 다음날도 그다음 다음 날도 우유죽 가마 앞에 줄 서지 않았습니다.
#3. 이제 우리들의 이야기 한자리.
우리 아이들 급식 문제가 한 도백의 불통 고집으로 다시 들끓네요. 다들 아시잖아요? ‘산 입에 거미줄 치랴’, ‘저 먹을 것은 다 저가 갖고 나온다’는 옛말요. 이 말은 곧 모든 인간은 먹을 권리를 태어나면서 하늘로 받았다는 천부인권 사상의 완곡한 우리식 표현 아니겠습니까?
왜? 법에 보장된 교육의 의무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면서 아이들의 제 것 찾아 먹을 권리를 갖고 그 못된 장난을 해요.
“나는 무료급식을 하기 때문에 맛있는 반찬 더 먹고 싶어도 더 달라지 못했어요.” 이 학생의 고백을 울컥거리는 심정 없이 들을 수 있는 어른들이라면 아예 정치는 접으셔야지요.
가난한 부모는 있겠지요. 그러나 가난한 아이가 어디 있습니까? 가난이야 부모 것이지 그게 왜 아이들 것인가요? 그들의 자존심, 잘난 조국에 태어난 그 대단한 자존심을 점심 한 끼의 흥정거리로 삼게 해서야 되겠나요?
내 나이 지금 76. 이제쯤 잊을 때도 됐으련만 지금은 없어진 국민학교 자리를 지날 때마다 우유죽 끓이던 가마 앞에 죽 양재기 받아 들고 서 있던 피란민 소년의 잔뜩 주눅든 모습이 어제 일처럼 생생히 되살아나네요. 제발 마셔요. 어린 영혼에 상처 주는 일들.
임병근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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