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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이젠 ‘한자 의타주의’를 버리자 / 이강규

등록 2015-04-27 18:52수정 2015-04-28 16:52

교육부가 지난해 9월 ‘고등학교 문, 이과 통합형 교육과정’에 관한 법률안을 확정하면서, 이것과 상관없는 ‘초등학교 교과서 한자병기 방안’을 슬그머니 끼워 넣은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이는 지금도 과외 학습 부담이 많은 어린 초등생들에게 큰 짐을 지우고 학부모들에겐 사교육비 부담만 늘어나게 할 것이다.

흔히 국한혼용이나 한자병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한자를 모르면 한자어의 뜻을 정확히 알 수 없어 학습이해도가 떨어질 것이라고 보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주장에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 보기를 들어보자. 學校는 뜻글자이고 ‘학교’와 School은 소리글자이다. 學校만 뜻이 있고 ‘학교’와 School에는 뜻이 없는가? 소리글자에도 다 뜻이 있다. 다른 말도 마찬가지다. 또 다른 보기를 들어보자. 은행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는 은행에 한번 갔다 오면 은행이 무엇인지 알지만, 은행에 가보지 않고 ‘은 銀, 갈 行’ 하며 한자로 은행을 가르쳐줘봐야 은행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이처럼 학습이해도는 보고 듣고 느끼고 부딪치면서 높아지는 것이지 한자를 알아야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자를 쓰면 우리말로 풀이하는 번역과정이 하나 더 늘 뿐이다.

한자어는 소리는 같지만 뜻이 다른 것이 많아서 한글로만 쓰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으니 한자를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우리 글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자어 위주로만 생각하는, 주인과 손님이 뒤바뀐 말이다. 한글을 쓰는 나라에서 한자어의 구별을 위하여 한자를 쓰자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는 외래어를 한글로 쓰면 알 수 없으니 그 나라 글자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같다. 우리말은 우리 글자로 적는 것이 마땅하다. 한자어가 소리는 같은데 뜻이 다른 것이 많다는 것은 글자로는 구별이 가능하나 말로서의 기능은 떨어진다는 말과 같다. 그런 한자말은 더욱 사용을 자제하고 거기에 알맞은 맨 우리말을 지어 쓰거나 풀어 써야 한다. 이제 한자 의타주의나 한자 사대주의는 버려야 한다.

또 한자는 뜻글자여서 사고력을 높여준다고 하는 주장도 근거 없는 말이다. 과학 문명이 어디가 더 발달했으며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유럽의 수준 높은 철학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소리글자의 나라가 아닌가? 소리글자도 다 뜻을 가지고 있음을 잊었는가? 한문 고서나 고전 같은 것은 맨 우리말로 번역하면 될 일을(그래서 나라에서 ‘한국고전번역원’을 설립해 운영) 한자를 모르면 역사와 전통문화가 끊어진다고 주장하고, 심지어 어떤 한문학과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노벨상이 안 나오는 이유를 한자를 안 써서 그렇다고 주장하니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말인가?

한자가 제 나라 글자인 중국이 왜 획수를 대폭 줄인 ‘간체자’를 만들어 쓰는지 그 이유를 한번이나 생각해 봤는가? 한자가 얼마나 불편하면 그러하겠는가? 이제 중국의 간체자는 우리와 통하지 않고 뜻글자도 아니다. 그러다보니 이젠 간체자를 배워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일본은 그들의 글자가 한자의 약자로 만들어진데다 ‘가나 50자’로는 필요한 말을 다 만들어 쓸 수 없으므로 한자를 활용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사정이 그러한 것을 중국과 일본이 한자를 쓰는데 우리나라가 한자를 안 쓰면 국제경쟁력이 떨어진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이런 억지 주장이 어디 있는가?

‘라디오’란 말을 쓴다고 해서 ‘radio’라고 적어야 한다고 자꾸 주장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한자는 중국의 글자이고 우리에겐 우리 글자가 있다. 한자어 때문에 한자를 배워야 한다고 할 것이 아니라 한자어를 차츰차츰 줄여나가야 한다. 교육부는 초등 교과서에 한자병기를 실시하기보다는 그 한자어에 알맞은 맨 우리말을 지어서 국민 앞에 내놓아야 한다. 그것이 교육부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강규 서울시 강동구 동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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