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나눔의 집을 찾은 응우옌떤런(오른쪽)씨가 위안부 할머니에게 팔찌를 받고 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학살 생존자 응우옌떤런이 베트남전 참전 군인에게
평화박물관 초청으로 지난 4일 한국을 방문했던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생존자 응우옌떤런(64)이 편지를 보내왔다. 행사 때마다 베트남전 참전군인들이 몰려와 “학살은 조작”이라며 시위를 했다. 이 편지는 바로 그들에게 보내는 것이다.
여러분을 먼발치에서만 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40년이 지난 지금, 서울 한복판에서 아직도 군복을 입은 당신들과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차에서 내려 직접 만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혹시 저와 탄 아주머니를 보러 오셨던 것은 아니었는지요? 경찰들의 신변보호를 받으며 무사히 호텔에 당도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쟁도 격렬하지만 평화 역시 격렬하구나!”
저는 울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탄 아주머니는 증언을 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더군요. 단지 성별이 달라서일까요? 일을 당했을 때 나는 그래도 열다섯살이었고, 탄은 겨우 여덟살이었습니다. 여덟살짜리가 무얼 알겠냐고, 학살은 다 지어낸 이야기라고 여러분들이 말씀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탄 아주머니는 그날 일을 너무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숨 쉴 때마다 울컥울컥 피를 토하던 다섯살짜리 동생, 그 동생을 도울 길 없어 울던 여덟살짜리 소녀. 총에 맞아 꾸역꾸역 밀려나오는 창자를 부여잡고 엄마를 찾아 헤매던 그날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한국군의 학살로, 저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어 고아가 되었고, 탄 아주머니는 어머니, 언니, 남동생, 이모, 사촌 동생 등 가족 다섯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평생 잃어버린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깊고도 깊은 고통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와 심장에서부터 나오는 이 모든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저희가 갑자기 서울에 나타나 몹시 불편하셨지요. 사실 한국 참전군인들도 많이 베트남을 찾았고, 베트콩 전사들 역시 여럿 서울을 방문하여 한때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던 사람들끼리 만남을 가졌습니다. 40년이란 세월은 한때의 적들이 서로 부둥켜안아도 이상할 것이 없게 만들 정도로 긴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사로서 마주친 적이 없던 우리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과 참전군인들이 서로가 가진 상처를 어루만져 주며 만나려면 얼마나 더 긴 세월이 흘러야 할까요.
저는 한국 병사들이 베트남에 1년 남짓 머물렀다고 들었습니다. 일흔쯤 되고 보면, 인생에서 1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닌 듯합니다. 그런데 베트남전 종전 40년을 맞이하여 한국에 와서 보니 그때의 젊은 한국군들은 아직도 아득한 베트남의 정글 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진즉 이 전쟁을 끝냈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여러분들도 여러분 마음속의 이 전쟁을 빨리 끝내길 기원합니다.
탄 아주머니의 작은아버지는 남베트남(한국의 동맹국 - 역자 주)의 군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을에서 학살당한 사람들 대부분은 남베트남 병사들의 가족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이때 죽은 탄의 남동생은 겨우 다섯살이었고요. 베트남 중부지방 곳곳에 있는 민간인 학살 위령비에 보면 한두살 아기들, 이름도 갖지 못한 갓난쟁이들의 죽음이 새겨져 있습니다. 저희들의 행사장 앞에서 여러분 중의 한분이 언론과 인터뷰한 내용을 전해 듣고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적군의 가족 역시 적군이라고 하셨더군요. 그렇다면 일본이 쳐들어왔을 때 맞서 싸운 의병이나 독립군 가족을 일본군은 모두 죽여도 되는 것인가요?
힘드셨을 겁니다. 전쟁이 저와 탄 아주머니의 인생을 철저히 부숴버린 것처럼 그놈의 전쟁은 여러분의 인생도 뒤흔들어 놓았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포함한 한국 사람들과 평화를 이야기하기 위해 왔지, 복수를 하려고 온 것도 아니고 여러분을 비난하러 온 것도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 역시 베트남 전쟁의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한국군들이 가난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 남의 나라 전쟁에 참여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당신들 역시 솜털이 보송보송한 갓 스물의 청년들이었지요. 남의 나라 낯선 정글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전쟁은 청춘들이 감당하기엔 너무도 버거운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겪어보니, 고통이란 것은 안으로 삭일 때보다 밖으로 털어놓을 때 가벼워지는 것 같습니다. 멀리서 보았지만 여러분들은 무언가에 몹시 화가 나 있는 듯 보였습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 안에 있는 응어리를 꺼내놓길 바랍니다. 그리고 당신들의 정부가 여러분의 고통을 끌어안고 아픔을 달래주면 좋겠습니다.
한국에 와서 저희가 처음 찾은 곳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계신 나눔의 집이었습니다. 우리를 초대해준 평화박물관이 베트남전 피해자들을 위해 써달라고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내놓으신 성금으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같은 전쟁 피해자라서 그런지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저 손잡아 주고 안아주고 등 쓰다듬어 주는 것만으로 정말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수류탄 파편에 맞아 평생 쑤시던 온몸도 저리지 않았습니다. 상처받은 사람들끼리 더 뜨겁게 더 많이 손잡았으면 합니다. 한국의 많은 참전군인들이 고엽제로 고통받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베트남에도 400만의 고엽제 환자가 있습니다.
이번에 얼룩덜룩한 군복을 입고 우리를 맞아준 군인들도 있었지만, 무릎을 꿇고 차마 말을 잇지 못하던 참전군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우리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달려와준 수많은 한국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한국은 제게 무척이나 두렵고 무서운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다녀오니, 그곳은 보고 싶은 친구들과 따뜻한 추억이 많은 그런 나라가 되었습니다. 제게는 더 많은 피해자들이 한국을 방문하게 되면 좋겠다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부모를 잃은 저를 키워준 것은 바로 마을 사람들이었습니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와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서로 다독이며 살아왔습니다. 부디 저를 키워준 마을 사람들이 오면 따뜻하게 맞아 주십시오. 그들 역시 학살의 피해자입니다. 여러분이 외면하고 싶어도 학살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제가, 탄 아주머니가 그리고 또 수많은 피해자들이 그 증인입니다.
이제 저도 파란만장했던 인생을 정리하는 나이에 들어섰습니다. 따져보니 참전군인들도 저와 몇 살 차이가 나지 않더군요. 전장이 아닌 곳에서 우리가 만났더라면 형과 아우로 지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저나 여러분이나 인생의 노년에 접어든 처지에 우리의 젊은 시절을 한번 되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과거의 상처를 잘 아물게 해서, 우리의 아들딸 그리고 손주들에게는 보다 평화로운, 더 좋은 세상을 남겨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베트남 떠이빈에서 응우옌떤런 드림.
번역 구수정(사회적기업 아맙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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