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혼용 논쟁에 문외자가 거들고자 한다. 오래전 외국에서 공부를 시작했을 때 중국계 학생들이나 일본 학생들과는 때로 한자를 사용하여 필담을 주고받은 기억이 있다. 그 당시 기억으로 중국 본토에서 유학 온 학생들의 경우 나보다 한자 정자의 이해가 모자라다는 느낌을 받았다. 문맹 퇴치를 위해 약자를 보급해온 결과라 생각한다. 이렇듯 중국 본토에서도 이제 잘 사용하지 않는 한자를 두고, 한글전용으로 전환한 지 수십 년이 흐른 뒤 지금 다시 병행 논의가 나오는 것을 보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든다. 한편으로는 한글전용 전환기와 지금의 시대상황이 많이 달라진 것이 하나의 원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1970년대는 식민지 아픔을 가진 이들이 기성세대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사대주의를 넘어서야 하는 국민의 자존심, 나아가 국가간 교류도 지금처럼 활발하지 않던 때였기에 한글전용이 시대적 요구인 면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어떤가. 한·중·일을 넘나드는 민간 교류가 그 당시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우리의 국력도 달라져 한글을 배우려는 외국인들이 늘어나는 지금 과연 한글전용이 아직도 유효한 시대적 요구인지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최근 일본의 연구자들과 공동연구를 수행할 기회가 많아져 일본을 여행할 기회 역시 늘었다. 일본 연구자들과 한국의 한글전용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설명을 하면, 그들은 일본이 한자를 버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며 우리의 한글전용에 경이로운 생각을 가진다. 나 역시 우리의 한글전용에 자부심을 느낀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젊은 학생들이 일본을 방문할 때 한자를 몰라 적지 않게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일본 유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일본어보다는 한자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형국이다. 70년대 고등학교를 다닌 나는 비록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많은 한자를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중국이나 일본에서 간판이나 지도를 읽고 길 찾기를 하는 데, 또는 간단한 필담을 통하여 의사소통을 하는 데 큰 문제가 없다.
한자문화권이었던 베트남도 오래전 한자를 버리고 외국인 선교사가 만들어 준 변형된 로마자를 이용하며, 중국도 우리가 알아보기 힘든 약자를 사용하며, 우리 역시 한글전용이 불편함이 없는 지금 굳이 전 국가적 한자병용을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초·중·고에서 시험이라는 부담을 주지 않으며, 많이 사용하는 한자 200~300자 정도를 가르쳐 준다면 실용적인 면에서 나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말의 뜻을 좀더 명확히 인식하고, 나중에 이들 한자권 국가와의 교류에 작은 보탬이 될 수 있는 정도의 한자교육이라면 한글전용의 의미를 크게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다만 둑이 조금 무너지면 후에 큰 물살이 넘쳐 오를 수 있음을 명심하고 경계를 늦추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김용민 단국대 응용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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