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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책과 함께 여행 떠나는 ‘짜릿한 상상’에 대해 / 윤영소

등록 2015-05-04 18:40

호텔에 가면 사람들은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뜬금없는 질문을 통한 별난 통계가 있다. 목적과 동행자에 따라 내용이 좌우되겠지만, 응답을 정리한 결과가 흥미롭다. 25개국 2만5천명을 대상으로 했으니 나름 유의미한 분석이 가능할 법도 하다. 눈에 띄는 응답은 호텔(침대)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이다.

여행지에서의 독서 풍경은 우리에게 낯설다. 가족 혹은 지인들과 함께 여행을 하면 책은 둘째 치고 혼자 있는 시간을 갖기 어렵다. 선친후사(先親後事), 한국인의 결속력 집착 증후군 때문에, 여럿이 여행을 하면서 각자의 시간은 쉽게 허용되지 않는다. 어쨌든 호텔에서 뭘 하느냐는 이 야릇한 질문에 책을 본다는 응답률을 나라별로 보면, 스웨덴 사람은 60%, 덴마크 58%, 러시아 56% 등이고 멕시코가 26%로 꼴찌를 면했다. 한국은 19%였다.

그럼 한국인들은 호텔에서 독서 아닌 어떤 활동을 했을까? 수다를 떨거나, 스마트폰을 하거나, 많이 나아졌다지만, 국내에서 공수한 고추장과 컵라면을 먹거나, 호텔 바에서 술을 마시거나, 그것도 아니면 지나친 과로 때문에 세상 등질 태세로 수면보충을 했을 것이다.

여행에 무슨 책이냐, 여행은 해방감과 일상에서의 탈주임을 강조할 수 있지만, 일상에서의 독서가 만족스러운 정도인 것도 아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4년 기준 2인 이상 가구의 한 달 도서구입은 1권, 연간 독서량은 10권 미만이며, 국민의 70%는 공공도서관을 이용하지 않는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독서 실태는 그래도 좀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 또한 오십보백보다. 어린 시절 그나마 책을 가까이하고 부모들도 자녀들의 독서력을 위해 신경을 쓰지만, 중학교 진학 이후부터는 양상이 달라진다. 접하는 대부분의 책들이 문제집이다. 교양서나 고전을 들고 있는 중고생을 만나기란 가뭄에 콩 나는 빈도이다. 1년에 네 번의 시험을 치러야 하고, 시험이 없는 때에는 성적에 반영되는 수행평가에 시달리는데 시험과 직접 관련이 없는 교양서와 고전을 만날 마음의 여유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대학생이 되어 좀 나아지는가? 도긴개긴, 전공 때문에 책을 본다고는 하나 억지춘향이다. 취업 강박에 대학생마저도 독서 아닌 시험 준비에 매달려야 한다. 인문학이니 하는 것도 취업의 수단으로 접근하니, 인문학 정신은 없고 얄팍한 상식만 남는다. 한두 해 전 유수한 대학에서 전공 도서마저도 복사본을 구해 강의를 듣는 제자들에게 강의를 맡은 교수가 책을 강제로 구입하게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을 정도다. 대학생들의 책꽂이에 어떤 책들이 있는지를 보면 우리의 책 읽기가 캠페인 수준으로 해결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좋은 삶을 위한 독서의 경험이 불가능한 지경이다. 사회적 생존을 위한 수험서, 자기계발서 위주의 책을 접하다 보니 책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게다가 이제는 초등학생 때부터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며 손바닥에서 감각적 자극을 주는 게임과 오락에 빠지니, 긴 호흡을 필요로 하고 다소의 인내와 주체적인 상상력을 동원해야 하는 책 읽기는 즐거움이 아닌 괴로움이 되고 있는 것이다.

매일 책을 즐기는 이웃 어린이가 있다. 그림책, 동화책을 몇 권 뽑아놓고 아예 책 속으로 들어갈 몰입의 표정, 얼마나 영특하고 기특하고 사랑스러운지. 아이 부모는 무슨 마법을 부린 것인가. 비장의 독서지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물으니 그런 것은 없단다. 엄마 아빠가 꾸준히 책을 보고 있었고, 아이를 학원에 보내지 않았고, 아이가 쉽고 편하게 읽을 만한 책들을 주변에 놓은 게 전부다. 물론 주변에 컴퓨터도 없고, 비싼 장난감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다. 영어와 수학이 중요하다고 선행학습을 시키지도 않는다. 심심하니 지척에 있는 책에 눈길이 가고, 자극적 매체가 없으니 그림과 활자를 통해 상상력을 펼치고, 그 천천히 오래가는 즐거움에 빠지는 것이다.

책은 한가하고 심심할 때 손에 잡히게 된다. 이 수동적 선택은 부모와 교사가 참으로 깊게 생각해봐야 할 대목이다. 여유 속에서 상상력은 작동되고, 심심해야 창의력이 발동된다. 물론 좀더 의지적으로 독서를 하는 경우라면 바쁜 가운데서도 자투리 시간을 잘 활용해서 책을 가까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책을 통한 자잘한 기쁨과 번뜩이는 깨달음이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리라.

오월 초입부터 긴 연휴가 시작되었다. 3200만명이 집을 떠나 여행을 할 것으로 추정된다고 언론에서 난리다. 다들 책을 한두 권씩 챙겨서 여행을 떠났을까? 출발 전 인터넷서점이든 헌책방이든 한두 권의 책을 미리 구입해서 여행을 떠난다면 우리나라는 어떤 나라가 될지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그러나 여행지의 호텔(숙박 공간)에서 무엇을 하느냐에 대한 설문이 다시 진행된다 해도, 어린 시절부터 사회적 생존투쟁에 허덕이고 이 메마르고 거친 사회적 환경의 개선 없이 꼴찌를 탈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적이고 냉정한 전망을 거두기는 어려울 것 같다.

윤영소 홍천해밀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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