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켄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에 따르면 명제는 세계에 대한 그림이다. 명제 또는 사태는 대상의 논리적 고유이름의 배열과 연결이다. 단어로 표상되는 단순한 대상들의 이름의 의미가 명료할 때 참인 명제가 올바른 세계를 구현해낼 수 있는 것이다.
세계에 대한 정확한 그림은 단어 의미의 명료성에 기인한다. 위안부라는 표현은 의미의 명료성을 결핍하고 있다. 그렇기에 ‘위로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인 위안(慰安·comfort)은 ‘위안부가 절대악(惡)의 발로(發露)’라는 명제를 구성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참회의 세계로 가해자를 인도하는 데도 무력하다. 오히려 당시 피해자들이 겪었던 참혹한 고통의 무게감만 증발시킨다. ‘과잉완곡’의 폐해다. 용어의 역사적 문맥에 익숙한 우리는 차치하고 제3자도 이러한 ‘분칠된 표현’ 너머를 정확히 독해할 수 있다고 낙관하기 어렵다.
그리스어로 ‘전체’와 ‘타다’의 의미를 지닌 합성어인 홀로코스트(Holocaust) 또는 ‘유대인 대학살’은 의미가 명료하다. ‘대학살 만행은 씻을 수 없는 죄다’라는 명제는 나치의 만행을 기억하는 게 독일의 영원한 책임이라 강조한 메르켈 총리 선언의 인식적 토대다. 독일이 자연스럽게 속죄의 세계로 진입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피해자가 견딘 고통의 무게감이 거세되지 않은 채 느껴진다. 누구나 단어만으로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고 가해자의 불의에 분노할 수 있는 것이다.
‘하루가 끝난 뒤 위안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울어버리기만 한 젊은 병사들도 있지 않았을까’라고 위안부의 고통을 읽어낸 <로마인 이야기> 저자 시오노 나나미의 병든 문학적 상상력은 단순 치기가 아니다. 공감 능력을 상실한 여성 작가의 모습도 아니다. 위안부라는 표현이 얼마나 명료하지 못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위안부를 ‘성노예’라 지칭하는 것이 처음에는 분명 낯설다. 어감이 달갑지만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표현은 인도에 반하는 범죄를 자행한 가해자의 극악무도함을 적나라하지만 정확하게 고발하고 있다. ‘절대악의 발로’이자 ‘참회의 세계’에서 영원히 속죄해야 할 이유인 위안부는 성노예라는 표현으로 치환돼서 명료화될 때 더 올바른 세계를 구현해낼 수 있다.
최시영 전 연세국제평론 부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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