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말은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입니다. 한자의 어법과 토박이말. ‘물론(勿論)’이란 말은 누가 봐도 우리 말입니다마는 그 구조는 “하지마 + 말”로 되어 있어, 우리 토박이말의 순서와 다릅니다. 우리 토박이말은 이 순서가 거꾸로이고, 명사 밑에 토씨를 붙여서 말을 이어 나갑니다. 그래서 ‘첨가어’라 하지오.(한어는 ‘고립어’라 하고) 그런데 우리는 한자어와 같이 이천년이나 살았습니다.
무릇 말에는 몸으로 체험할 수는 없이 머릿속에서 상상력으로 왔다갔다하는 개념이 많습니다. 원래 말이란 머릿속의 물건이랍니다. ‘光化門’을 ‘광화문’으로 쓴들 무슨 다를 바가 있느냐고 하시겠지만, 다릅니다. “‘광화문’ 앞에서 만나자”고 할 때에는 ‘광화문’으로 족하겠지만은, ‘光化門’의 뜻이 “사방을 빛으로 덮고, 만물을 화육한다”는 왕궁의 정문다운 글귀란 것을 음미하자면 한자가 필요하지요. 그런데 우리의 말 대부분이 단순한 기호를 넘어서 개념, 즉 뜻이랍니다.
“시대적 요구”로 한글 전용을 하게 됐다 하시는데, 여기에는 역사적 이유가 아닌 게 아니라 있습니다. 사대를 하던 한자의 종주국 힘의 약발이 떨어져 지금은 서양의 문물이 세계를 지배하니, 쏠림 현상으로 한자를 내던진 것인데, 이것은 우리의 말과 글의 특성에 생각이 미치지 못한, 무모한 행위였습니다. 이 행위가 독립정신과도 상관없는 것이었다는 것은, 지금 서양 낱말이 얼마나 무분별하게 길거리(아파트 이름, 상호를 보십시오)에, 신문지상에 범람하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일본말은 한어뿐 아니라 토박이말까지 한자로 표현하고 있는 상태라, 한자의 영역이 우리보다 더 넓은 꼴입니다. 일본 사람이 우리의 한글 전용에 “경이”했다면 그것은 부러워서 놀란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런 무리한 일을 하고 있느냐고 하는 것일 것입니다. 우리가 한자를 알고 있으면 일본에서, 중국에서 의사소통에 도움이 되는 게 당연하지요.
지금 길거리에서나, 기차 안에서 한자, 한어 대접이 극진한데, 이것이 다 노골적으로 상업주의에서 나왔다면, 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까? 그들을 위해 만들어진 관광용 지도에는 우리에게는 가려져 있는 한자 지명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베트남이 지금 알파벳을 쓰고 있는 것은 프랑스에 점령당한 결과이고, 그래서 거기 사람들은 한자로 된 그들 나라의 역사문헌을 읽지 못합니다.
한글 전용이 불편 없이 잘되고 있다고 하시는데, 모르고 있으면 무슨 불편인들 느낄 수 있겠습니까? 한자를 모르니 말을 잘못 쓰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과태료’를 벌금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는데, 이것은 엄연히 “날짜를 어긴 태만에 대한 윗돈”이란 뜻입니다, 즉 過怠料이지, 罰金이 아닙니다. 그리고 건물이 빼곡히, 그리고 나란히 선 것으로 ‘즐비(櫛比)’하다고 하는데, 땅에 떨어져 있는 것도 ‘즐비’하다고 하는 등, 요새 보는 글은 왕왕 형용이 잘못되거나 부정확합니다. 사자성어는 왜 그리 좋아하는지. 신문지상에 사자성어가, 그것도 어려운 말이 심심찮게 오르내리는 걸 보면 우리 국민의 한자 수준이 대단한 것 같기도 보이는데, 다 모순현상입니다.
우리 언어의 역사와 특성으로 봐서 초년부터 한자교육을 실시하는 게 정상입니다. 관공서 공문이나 사회적 문건에도 충분히 한자혼용을 하되, 어려운 글자에는 토를 달아주면, 중학생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토박이말도 꾸준히 발굴하여 우리의 어휘를 늘려가는 것도 마땅히 할 일입니다. 우리도 ‘혈안(血眼)’이란 말을 자주 보는데, 아마 일본어에서 건너온 것이겠지요. 그런데 일본말에서 이 말은 토박이말이랍니다. 즉, 한자어인 “혈안”(“게쓰간”)이라 읽지 않고 “치마나코”라 읽습니다. 이럴 때 토박이말은 얼마나 박력이 있습니까. 토박이말이 풍성하고, 한자도 친근할 때 우리 글과 말은 정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최찬식 한국어문회·한자교육연합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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