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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밥과 밥줄의 권리 / 박은정

등록 2015-07-08 18:26수정 2015-07-08 22:49

중세 유럽엔 갖가지 동물과 가금류, 해산물이 그득한 귀족이나 왕족의 음식물 저장소를 그린 그림이 유행했다. ‘음식물 저장소’ 안에 놓인 식재료가 귀족의 지위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에서 사냥은 왕족이나 귀족에게만 허용됐고 신분에 따라 포획할 수 있는 대상도 달랐다. 왕족이나 귀족에게만 수렵권이 있었고, 영지는 물론 광활한 숲과 주인이 없는 공유지에서도 귀족이 아니라면 새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다. 영국 원주민 색슨족의 후예 로빈 후드가 굳이 숲을 활보하면서 사냥을 일삼은 배경엔 노르만 왕족이나 귀족의 수렵권, 즉 노르만의 권력을 침범하려는 의도를 반영한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4월15일 인사권과 경영권은 사용자 고유의 권한이므로 단체협약으로 이를 침해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면서 사용자의 인사권과 경영권을 침해하는 단체협약은 시정지도를 통해서 고쳐나가겠다고 발표했다. 단체협약을 자율적으로 고치는 사업장에는 인센티브를 주기도 하고, 간담회도 하고 면담도 하면서 개정하도록 지속적으로 간섭할 예정이란다.

고용노동부는 단체협약으로 회사 마음대로 노동자의 밥과 밥줄인 임금이나 고용 문제를 휘두르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노동조합을, 노르만 귀족의 사냥터를 침범하던 로빈 후드 정도로 여기는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노동자의 밥과 밥줄의 문제를 헌법과 노동법이 권리로 인정하는 사회다. 나아가 임금과 고용 문제를 비롯한 회사의 규범을 노사간 대등한 지위에서 자유의사에 따라 결정하도록 근로기준법이 원칙을 정한 사회다. 당연히 인사권과 경영권은 중세의 수렵권과 달리 법률로 제한할 수 있는 권한이다.

노동법이 원칙으로 제시하는 대등한 지위에서 노동조건, 즉 임금이나 고용 사업장의 규범을 정하기 위한 전제는 개별노동자와 사용자 간 개별 근로계약이 아니라 집단적 근로계약의 보장이다. 현실에서 집단적 근로계약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노동조합과 사용자 간 단체교섭에 따라 근로조건을 약속하는 단체협약이다. 취업규칙을 불리하게 변경할 때 근로자 집단 과반수가 동의하는 절차를 거치도록 한 취업규칙변경 조항도 제한적이나마 밥과 밥줄의 문제를 노동자의 권리 문제로 현실화하는 수단이다.

행정기관의 행정지도는 ‘법을 위반’한 사항에 대해서 ‘행정 목적’ 실현을 위해서 하도록 행정절차법은 정하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법을 위반하지도 않은 단체협약’을 노동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용자의 ‘인사·경영권’ 보호를 위해 ‘단체협약 시정지도’에 나섰다.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취업규칙을 바꿀 때는 반드시 근로자 집단 과반수 동의를 얻도록 법이 정하고 있지만, ‘취업규칙 변경요건 가이드라인’으로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바꾼 취업규칙도 효력을 인정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노동법의 원칙을 엄수해야 할 고용노동부가 불법을 감수하면서까지 사용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형국이다.

헌법과 노동법의 기본원칙을 정부가 앞장서 허무는 사회지만 차마 ‘로빈 후드’가 될 수는 없는 노동자들은 밥과 밥줄의 권리를 찾기 위한 고된 싸움을 계속해 나가고 있다.

박은정 민주노총 정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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