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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너무’의 의미 수정 이후 / 김수범

등록 2015-07-16 19:05수정 2015-07-16 19:08

‘너무’의 뜻이 바뀌었다. 부사 ‘너무’가 지금까지는 ‘정해진 정도나 한계에 지나치게’라는 뜻으로 부정적인 상황에서만 쓸 수 있었지만, 이제 긍정적인 상황에서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일정한 정도나 한계를 훨씬 넘어선 상태로’라는 뜻으로. 최근 국립국어원에서 이 단어의 언어 사용 현실을 반영하여 의미를 공식 수정했다고 한다.

이 결정을 많은 사람들이 반기는 모양이다. 그동안에는 이미 입에 익어 상황을 가리지 않고 사용하면서도 규정 때문에 찜찜하였는데(?), 이제 더 이상 ‘눈치’를 보지 않고 사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변화가 반갑지만은 않다.

언어란 그 언어를 사용하는 대중의 약속이다. 대중의 언어 사용 현실이 언어 규정에 앞서는 것은 당연하다. 언어는 그래서 변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너무’의 의미 수정은 자연스런 언어 역사이다. 그러나 ‘너무’의 뜻이 확장되면서 부사 체계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 싶다.

우리말에는 정도를 강조하는 부사가 매우 다양하다. ‘매우, 너무, 꽤, 아주, 참, 정말, 진짜, 몹시, 되게, 되우, 된통, 무척, 지지리, 실컷, 퍽, 엄청, 심히, 상당히, 대단히, 굉장히, 직사하게 등등’에다가, 사투리 ‘겁나게, 억수로’와, 비속어 ‘졸라, 짱’까지, 그 어느 나라의 말보다 많고도 다양하다. 이 단어들은 비슷하면서도 의미와 쓰임새가 조금씩 다르다. 의미와 쓰임새가 조금씩 다른 단어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의미를 정확하고 정교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만큼 우리말이 풍성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20여년 전부터, 방송 매체의 영향에 따른 현상으로 짐작한다) ‘너무’가, 여러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인 ‘너무’가 다른 모든 유의어 부사를 삼켜버렸다. 원래 자기 몫이 아닌 자리까지 차지하여 우리말의 (정도를 강조하는) 부사 체계를 단순화해 버린 것이다.

‘너무’의 고삐가 풀린 부사 체계는 어떻게 변할까? 나머지 부사들이 점점 더 자리를 잃고 쓰이지 않게 되어, 우리말이 그만큼 빈약해지고, 그만큼 미세한 차이를 정교하게 표현할 수 없게 되지는 않을까 싶은 것은 기우일까?

대항마가 없지는 않다. ‘너무’도 이제는 식상해졌는지 사용 빈도가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방송매체밖에 모르던 구세대나 아직도 ‘너무’에 매달려 만능키인 듯 쓰고 있지만, 인터넷 세대는 다른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 ‘졸라, 짱, 개-, 지리게’ 같은 비속어가 인터넷을 타고 유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속어는 적의 적이 될 수는 있어도 아군이 될 수는 없다. 의사를 정교하게 표현하고, 우리말의 풍성함을 지키기 위해, 의미와 쓰임새에 맞는 어휘를 구사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김수범 경북 구미시 고아읍 원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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