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섹남이라는 신조어와 함께 요리사는 상당히 뜨겁다. 이전에는 관심에도 없던 요리사들이 셰프라는 멋진 이름을 달고 텔레비전을 독점하다시피 한다. 아이돌 가수 이름은 몰라도 요리사 이름은 누구나 아는 세상이 되었다. 연일 이들의 요리는 에스엔에스를 점령한다. 이목의 집중은 또한 이슈를 낳기 마련. 젊은 요리사의 기발한 요리가 최고의 가십이 되었고, 해외파 요리사의 비판은 엄청난 후폭풍을 만들었다. 그리고 조미료 세계에선 꽤나 큰 크기를 자랑하는 녀석. 요 설탕 녀석이 요즘 문제다.
멋진 셰프 군단과 따로 브라운관을 나 홀로 점령해나가는 집밥 백선생이자 요식 사업가이며 슈가보이인 백종원이 있다. 그에겐 실로, 정말 실로 막대한 관심과 애정이 쏟아지고 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신랄한 비판과 함께 말이다. 비판의 요점은 설탕을 과다하게 사용한다는 것과 그가 정식 요리사가 아니라 요식 사업가라는 것이다. 이 두 비판은 다른 맥락처럼 보이나 절묘하게 한 주제로 수렴한다. 바로 ‘맛있음’이다.
백종원의 요리가 그 자신의 프랜차이즈를 홍보하는 수단이라는 다소 음모론 수준의 비판을 제외한다면, 많은 비판들은 사실 맛있음을 획득하려는 투쟁이다. ‘맛있다!’라는 느낌은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또한 문화적이며 사회적이다. 무엇을 맛있다, 맛없다 정할지는 개인의 선호 문제지만, 그 선호는 문화 속에서 만들어지며 사회적 맥락과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이 싸움엔 두 팀이 참여한다. 고급과 대중.
슈가보이의 공격은 맹렬했다. 박학다식함으로 무장한 그는 지상파 프로그램에 나와 설탕을 들이붓기 시작한다. 맛있음이라는 느낌은 특별하지 않음을 설파한다. 단지 너희가 맛있다고 느끼면 그게 바로 ‘맛있음’임을 알려준다. 우리가 은연중에 지니고 있던 단맛은 저급한 맛이라는 고정관념을 파괴하고 맛의 평등화, 정당화를 수행해 나간다. 기존 맛의 위계를 급진적으로 엎어 버린다. 단맛에서 맛있음을 느낄 때 함께 찾아오던 죄책감을 없애 버린다.
슈가보이의 맹공에 정신 못 차리던 상대편은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선다. 단맛은 맛있음이 아님을 열심히 증명한다. 단맛은 말초적 쾌락이며, 쾌락이 아닌 그 너머의 심도 있는 맛이야말로 바로 맛있음임을 설명한다. 한 칼럼니스트의 “음악이나 미술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위해선 열심히 공부해야 하듯, 맛 또한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공부해야 한다”는 말은 꽤나 노골적이다. 맛있음을 알기 위해선 진입비용을 충분히 지급해야 하며 네가 지금 느끼는 그 맛있다는 느낌은 진정한 맛있음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백종원은 자신의 방송 이름을 ‘고급진 레시피’로 지었다. 맛있음을 넘어 감히 고급까지 넘본다. 백종원이 의도했든 아니든, 이는 중요하지 않다. 이는 우리가 막연히 가지고 있던 맛의 위계에 대한 전복이다. 설탕이라는 말초적 자극이 맛있음을 획득하려는, 외국에서 정식 코스를 밟은 것도 아닌 일개 요식 사업가의 도전이자, 음악, 미술과 같은 영역에서 이루어져 온 고급과 대중이 벌이는 또다른 영역다툼이다.
김정혁 동국대 사회학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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