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왜냐면

[왜냐면] ‘상고법원의 새로운 시작’,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 서기호

등록 2015-07-29 18:23수정 2015-07-29 22:08

포털사이트에 ‘대법원’을 검색하면, ‘상고법원의 더 나은 사법 서비스’라는 홍보 동영상이 먼저 나온다. 대법원 누리집에는 상고법원 홍보 웹툰이 자리잡고 있다. 놀랍게도 딱딱하기만 하던 대법원이 만화까지 홍보에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대법원이 공을 들여 ‘상고법원’을 홍보하고 있지만, 최근 여론조사 결과 87.4%가 상고법원을 잘 모른다고 응답한 것처럼 국민 대다수는 그것이 어떤 제도인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하자는 것인지 잘 모르고 있다.

대법원이 말하는 상고법원제도는 상고사건(3심사건)을 전담하는 법원을 새로 만들고, 상고사건 중 이른바 ‘사회적으로 중요한 소수 사건만’을 대법원에서 처리하겠다는 것이다. 상고사건 수가 많아 현재 대법원이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이유로 든다. 과연 상고법원이 도입되면 충실한 재판으로 대국민 사법 서비스가 더 좋아질까?

먼저 상고사건이 많아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따져보자. 대법원은 마치 우리나라 국민들의 ‘삼세판’ 심리 때문에, 상고사건이 폭증하는 것처럼 주장한다. 하지만 ‘대법원까지 가보자’는 것은 지난 60여년간 고착화되어온 충실한 재판이 아닌 신속한 재판을 중시하는 법원 분위기, 이에 따른 1, 2심 부실화 및 사법부에 대한 신뢰 약화 때문이다.

필자가 판사로 근무하면서 느낀 것은 법원이 일선 판사들에게 ‘충실한 재판보다는 신속한 재판’을 은근히 강요한다는 것이다. 판사들의 근무점수를 주는 법원장들은 사건처리 건수를 중요한 평가 요소로 보기 때문에, 일선 판사들은 사건 처리 속도와 처리 건수에 연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심지어 판사들에게 사건처리 통계표를 회람시키는 법원장도 있었다. 소속 법원의 사건처리 속도를 잘 관리하는 법원장들은 대법관 후보로 낙점받는 데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판사들에게 있어 ‘사건’이란 당사자들의 억울함이 절절히 묻어나는 ‘해소되어야 할 고통’이 아니라, 신속히 처리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한다. 억울한 사건 당사자가 생기지 않도록 사건을 살피고 또 살펴 충분히 귀담아듣고 재판하기 어려운 구조인 것이다. 부실한 1심 재판을 받았다고 생각이 들면 자연스레 2심, 3심으로 가서라도 억울한 심정을 이야기하고 받아주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판사들은 왜 재판을 엉망으로 해도 징계받거나 탄핵을 당하지 않나요?” 국회로 찾아오는 민원인들의 원성이 자자하다. 대법원까지 가도 억울함이 풀리지 않아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국회까지 찾아오는 것이다. 사법부에 대한 불만과 불신은 생각보다 깊었다. 단순히 상고법원 하나를 새로 만든다고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가 더 충실하게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1심부터 충실한 재판이 이루어지지 못한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1심, 2심 재판 충실화가 ‘더 나은 사법 서비스’의 핵심인 것이다. 사회적 비용도 더 적게 든다. 그런데 상고법원이 도입되는 순간 하급심 재판 충실화는 점점 더 멀어질 가능성이 크다. 대다수의 상고사건을 상고법원에 전담시키게 되므로 대법원 입장에서는 사실심 충실화를 위한 제도 개선의 동기가 약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상고제도 개선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참여정부 시절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에서 고등법원에 ‘상고부’를 설치하는 방안을 만들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폐기되었다. 이번에 대법원이 정부입법이 아닌 의원입법으로 우회적인 방법을 취한 것도 문제지만, 참여정부의 고등법원 상고부 안보다 훨씬 후퇴한 안을 제시하고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고등법원 상고부 안은 대법원에 직접 상고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더라도 당사자가 대법원에 이송해줄 것을 신청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했다. 하지만 이번 상고법원 안은 대법원이 대법원에서 심리할 사건과 상고법원에서 심리할 사건을 분류한 결정에 대하여 당사자가 불복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즉, ‘당신 사건은 대법원이 아니라 우리 아래에 있는 상고법원에서 판단하면 됩니다’ 하면 이에 따를 수밖에 없다.

국회나 학계에서는 대법관의 증원 및 구성의 다양화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하지만 대법원은 대법관 증원은 절대 반대하면서 대법관 구성 다양화에 대해서는 ‘상고법원만 만들어준다면’이라는 전제조건을 달며 버티고 있다. 비슷한 배경, 가치관을 가진 대법관들로만 구성된 대법원이 다양한 사회적 가치를 반영한 판결을 내릴 것이라고 기대하긴 어렵다. 대법원이 다양한 사회적 가치를 공정하게 잘 조율하는 기관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대법관 구성의 다양화가 필수적이다. 그 과정에서 대법관 증원 안에 대한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다.

사실 대법원이 상고법원 도입에 사활을 거는 속사정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다. 첫째는 헌법재판소와의 관계에서 대법원의 권위를 유지하는 수단, 둘째는 고위 법관들의 인사적체 해소인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보면 상고법원 도입이 과연 국민을 위해서인지 대법관 및 법원장 등 고위법관들을 위한 것인지 의문이 간다. ‘상고법원의 새로운 시작’, 과연 누구를 위한 시작일까.

서기호 국회의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