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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왜냐면

[왜냐면] 혐오의 시대를 넘어 / 권태현

등록 2015-09-14 18:39

언어가 가지는 힘은 강력하다. 무언가 언어로 규정되면, 부유하던 현상들은 그 언어를 중심으로 견고하게 조직된다. 새로운 어휘는 많이 쓰이면 쓰일수록 확대되며 더 많은 현실의 모습들이 그 어휘의 범주로 들어오게 된다. 반대로 현실에서는 그 ‘말’의 현상들이 재생산되기도 한다. 새로운 현상은 언어로 규정되었을 때에야 뭔가 파악되는 실존으로 다가온다.

‘일베충’에서 나아가 ‘맘충’ ‘급식충’까지, 신조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이런 말들은 요즘 정말 잠깐만 인터넷을 둘러보아도 쉽게 볼 수 있는 말들이다. 인터넷 은어나 비속어에 익숙한 나에게도 이런 말들은 불편하고 충격적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런 말들이 모두 새로운 현상을 표현하기 위해 쓰이는 말이 아니라는 점이다. 잘못된 육아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부모들은 예전부터 있었고, 나도 학창시절에 공부시간보다는 급식시간이 즐거웠다. 그냥 존재하던 것들이 저런 혐오의 언어로 규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또 요즘 자주 쓰이는 표현으로 ‘-충’ 접미사 말고도 ‘암 걸리겠다’라는 말이 있다. 왜 이런 표현이 생겼을까? 전통적으로 쓰여온 질병에 빗댄 비속어 ‘지랄’의 현대화일까? 부모님이 암 투병중인 나의 친구는 농담처럼 쉽게 오르내리는 그 표현에 자꾸만 표정이 굳는다. 인간의 가치는 너무 가벼운 것이 되었고 혐오는 아주 보편적인 것이 되었다.

주목할 만한 건 ‘-충’이라는 접미사만큼 ‘갓-’ 접두사나 ‘-느님’ 접미사도 많이 쓰인다는 점이다. ‘치느님’으로 대표되는 아주 노골적인 물신주의가 우리 사회의 기저에 있다. 물신과 찬양 그리고 인간에 대한 혐오의 극단에서 우린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처음에 이야기했듯 언어는 그냥 ‘말’ 그 이상이다. 그 사회에서 쓰이는 말들을 보면 그 사회의 문화와 성격을 알 수 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지만, 언어는 사회구조를 반영하고 현상을 포착한다. 요즘 쓰이기 시작한 저런 말들이 비추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무엇일까? 아주 중요한 것들이 장난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이건 모두 저런 이상한 말을 쉽게 사용하는 젊은 누리꾼들의 잘못일까. 저것들도 현실을 반영해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 세계에서 인간의 가치를 돌아봐야 한다. 하루 4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청년들은 이제 토익 점수로는 모자라 외국어를 두 개씩 공부하고 온갖 스펙으로 무장하지만,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없어 불안하다. 정부는 노동개혁을 해야 한다며 이런 구조의 문제를 어머니 아버지 세대 탓이라 한다. 정규직 일자리를 얻기는 하늘의 별 따기고 그 일자리마저 더 불안해지고 있다. 절로 패배자가 무수히 양성된다. 가만히 있어도 우리는 자존을, 우리의 가치를 잃어가고 있다.

서로를 벌레로 칭하고 죽음에 이르는 병을 농담처럼 주고받는 ‘헬조선’에서 우린 살아간다. 녹록지 않은 세계이지만 일단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서로를 껴안고 버텨도 힘든 세상에서 이렇게는 안 된다. 구태의연한 결론이지만 혐오의 시대를 넘어 인간의 가치를 모색하고 회복할 때다. 천천히 주변부터 돌아보자. 이제 헬조선엔 사계절도 없어지고 있다. 요즘처럼 좋은 날씨는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더 늦기 전에 오늘은 이번에도 이력서 서류 탈락을 했다는 친구에게 조용히 맥주 한잔을 권해야겠다. 가을로 가는 환절기의 시원한 바람과 약간은 어색한 공기, 무엇보다 아직은 조금 남아 있는 온기를 나누고 싶다.

권태현 서울 노원구 공릉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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