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아베 신조 정부가 출범한 뒤 한-일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고 있다. 지난 8월14일에 나온 아베 총리 담화는 사죄의 뜻을 담지 않았을뿐더러 한 나라의 총리 담화로서는 희화적인 느낌을 줄 정도로 수준 이하였다. 한-일 간의 ‘역사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을 상황에서 우리 스스로 진지를 허물고 대오를 흩트리는 ‘이적행위’가 벌어지고 있다.
서울 도심 웨스틴조선호텔 옆에 환구단이란 사적지가 있다. 대한제국의 본궁으로 새로 지은 경운궁(현 덕수궁) 바로 앞이다. 1897년 10월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하늘로부터 황제의 지위를 부여받는 의식을 치른 곳이다. 이곳은 원래 청나라 칙사가 오면 숙소로 쓰던 남별궁 자리인데 황제는 굳이 여기에 제천단을 지어 수백년간 내려온 책봉 체제를 청산하는 뜻을 담았다. 조선이란 국호도 태조 때 명나라 천자로부터 선정받는 형식을 취한 것이라고 하여 버리고 우리를 가리키는 다른 호칭으로 한(韓)을 택하여 대한제국이라고 하였다. 자주독립의 근대국가 정신이 꽃핀 역사적 장소다.
1904년 2월 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켜 그 군사력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기 시작하였다. 1905년 11월에 을사조약을 강제하고 1907년 6월 고종황제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불법을 만천하에 알리자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켰다. 1910년 8월에는 아예 나라를 일본에 합병시켰다. 저들은 환구단의 중요성을 직시해 이를 헐고 그 자리에 일본제국의 고관들이 와서 머무는 철도호텔을 지었다. 한국 근대국가 정신의 발상지인 환구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한쪽 모서리에 부속 건물로 지은 황궁우만 남았다.
환구단 건너편 언덕에 대관정(大觀亭)이란 대한제국 영빈관이 있었다. 서양식 2층 건물이었다. 1899년 독일 황제의 동생 하인리히 친왕이 이곳에 머물고 황제가 그의 폐현에 답하여 이곳을 찾은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런데 러일전쟁 때 일본의 한국 주차군이 이곳을 무단점거하여 사령부로 썼다. 황궁, 특히 황제의 거처인 함녕전을 한눈에 내려다보면서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을사늑약 때 특파대사로 온 이토 히로부미는 종일 여기서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와 함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조약 강제의 지휘탑이었다.
주한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저녁 6시께, 자신의 힘으로는 한국 대신들과 황제의 저항을 꺾을 수 없으니 특사가 나서달라는 전갈을 보내 왔다. 이토는 하세가와와 함께 마차를 타고 수백명의 군경을 거느리고 한국 황제와 대신들이 있는 7~8분 거리의 중명전으로 갔다. 이토는 황제의 저항으로 새벽 1시를 넘겨 겨우 상황 종료를 선언할 수 있었다. 하세가와는 강제합병 때까지 대관정에 머물면서 필요할 때마다 병력 동원을 지휘하였다. 대관정은 중명전과 함께 일제의 한국 국권 탈취의 현장으로서, 이를 규탄하는 민족사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장소다.
이 역사적 장소에 지금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현재 사유지로 되어 있는 이곳에 호텔 신축 신청이 들어와 발굴을 시행한 결과 대관정 건물터의 지하 유구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높은 지가로 정부 매입이 어려워 호텔 건축을 허용해야 할 상황이라고 한다. 2001년에 발족한 ‘한국 병합’의 불법성에 관한 국제 공동 연구팀이 2007년 서울에서 회의를 했을 때, 일본의 저명한 교수들이 ‘보호조약’이 강제된 현장을 보고 싶다고 해서 대관정 자리와 중명전으로 안내했다. 주차군 사령부가 대관정을 점거하여 황제를 감시했다는 나의 설명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던 그들의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2010년 한국 병합 100년에 즈음하여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이 나왔다. 한국 병합은 불법이라는 표현을 최초로 담은 이 성명에 일본 쪽 서명자가 520여명이나 되었다. 이 이변의 중심에 그들이 있었다. 이곳에 초고층 호텔이 곧 들어선다니 그분들을 어떻게 대면해야 할지 참담한 심경이다.
일제의 불법 침략의 핵심 증거를 우리 손으로 훼손하고, 침략자들이 고의로 호텔을 지어 반토막 낸 근대 자주독립국가 정신의 발상 지역에 우리 손으로 또 초고층 호텔을 지어 겨우 남은 자취마저 더욱 초라하게 하는 행위가 과연 ‘문화 융성’의 시대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이곳에 호텔이 아닌, 근대 민족정신을 기리는 역사문화의 다목적 공간을 탄생시킬 수는 없을까? 짓밟힌 역사를 끌어안고 항쟁의 넋을 기리는 것이야말로 창조적 민족 본연의 임무가 아니던가? 2009년 중명전 복원을 능가하는 특단의 조처가 요망된다.
이태진 전 국사편찬위원장·서울대 명예교수